주 1회 독서 후기 공유 모임
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이번 주는 본격적인 봄을 맞아 매일 달리기를 했는데요,
하루에 1시간~ 1시간 30분씩 달리기를 했습니다.
거의 매일 근육 운동을 하고, 근육을 푸는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워밍업까지 하면, 달리기는 총 1시간 30분~ 2시간 정도는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의 저의 산만함을 정리하기에는 운동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더 열심히 했습니다.
지난주는 지난 4개월 반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렇게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으로 기력을 쏟은 결과가 무엇인가?
남은 게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결국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동안 정착할 집을 정하게 되었지만,
금융시장에서는 그 노력 끝에 결국 딱 제자리걸음인 것입니다.
가장 아까운 저의 이 시기 소중한 시간을 이렇게 보냈다는 것도 반성하게 되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잃은 저의 집중력이 제일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 아래 다시 집중을 해보려고 해도, 잡념들로 가득해 여전히 쉽지 않았습니다.
왜 이전으로 돌아가기가 힘들까?
고민하며, 시도를 해본 게 운동이었습니다.
최소한 운동을 하는 시간만큼은 집중을 하게 되니까, 그것 만으로도 너무 다행이었습니다.
투자도 이 시기가 제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고요.
트럼프가 뭐라 하든 이제는 그냥 이 늙은이(?)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고,
우리나라는 대선이라는 변수도 있고요.
이런 회오리가 지나간 다음 평안한 시기에 다시 돌아오자 하는 마음을 가지니 훨씬 쉬워졌습니다.
부모님께도 일부러 연락을 덜 드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영역 밖의 일이라는 생각으로,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냥 부모님 두 분이 알아서 결정하시는 것이 맞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요.
나중을 자꾸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대비가 안되면 안 되는 대로 그냥 그것이 부모님의 인생이거니. 하고 이제는 놓아야지 제가 살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걸 다 제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사람들 사는 것처럼 안되면 안 되는 대로 그냥 살자.
제 부모님의 노후는 꼭 이렇게 해드리고 싶다. 그런 욕심을 이제는 정말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부모님인데 제가 엄마만 안타까워하는 것도 있었던 것 같고요.
그것도 노력이 필요해서, 이제 적당히.. 각자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연락도 적당히 드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입니다. 오히려.. 나이에 비해 철이 거꾸로 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제 마음이 힘들어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네요.
어쨌든 운동을 하고 나니, 이전보다는 책을 읽을 시간은 줄었지만, 더 잘 읽히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태풍이 지나간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항상 그렇듯, 어떤 것이든지.. 헛된 시간이 없긴 합니다.
뭐든 몰입했으면 그만큼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조금이라도 시야가 트이거나, 생각이 달라지는 것을 경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이 효과가 있을지는 앞으로의 저의 삶을 봐야 알 수 있는 것이겠지만요.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루틴 하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내공이 아니었던 게 몹시 아쉽고,
그것이 다 드러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합니다.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이번에 여러모로 많이 깨달았습니다.
너무너무 사설이 길었습니다.
이제 책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지난주 후기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저의 감정도 절정에 달해서, 영광과 민우의 감정을 들어 저의 내면의 갈등을 토로했었는데요.
그 이후 이번 주는 단념하는 시간을 가지다 보니, 유독 그런 글귀들이 또 눈에 들어왔습니다.
서희는 박의원이 죽고서야 비로소 자신도 그런 박의원을 굳이 거부하지 않고 계속 그 병원을 다녔던 것에서,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길상이 10년 넘게 옥에 있는 시간 동안, 자신도 박의원의 정신적 사랑에 의지했던 것이지요. ㅜ
서희와 박의원이 끝까지 자신들의 본분을 지켰기 때문에 더 아름답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용이 강청댁이 있는 상황에서 어린 길상과 봉순이를 데리고 오감대 구경을 시켜주는 그날, 월선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것에 저는 실망을 했었습니다.. 소설 속에 그려지는 용이는 그러지 않을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그만큼 제가 사회가 만들어놓은 형식과 틀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겠지요.
물론 그 이후에는 용이와 월선이 너무 애틋하고 가슴이 아팠지만요.. 적어도 당시에 부모님 뜻을 따라 멀리서 시집온 강청댁은 몰라도, 임이네 만큼은 월선을 위해 재껴도 되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도 있고요.
어쨌든 박의원의 그 서희에 대한 사랑은 서희의 아들 환국까지도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그 숭고한 사랑을 존중할 정도였으니까요..
서희는 박의원이 죽은 후에 마음이 괴로워 남편 길상의 관음탱화를 장엄하는 의식도 참석하지 못합니다. 하루 늦게 가지요.
그 시간 서희는 평사리 최참판댁의 별당아씨(서희 어마)가 거처하던 별당에 앉아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5살 난 딸과 그 대단한 집안을 두고, 하인 구천과 도망갔던 어머니를 이해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불행한 여인이었던가? 행복한 여인이었던가?
어머니는 불행했지만(도망 다녔지만) 사랑을 성취했다..
나는 행복한 여인인가? 불행한 여인인가?
서희는 눈물을 흘립니다.
왜 이렇게 먹먹한지 모르겠습니다.
전혀 결은 다르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버지의 딸인 저도 먼 훗날, 아버지와 같은 삶을 원할지 모르겠다는 막연한 예감이 있어서인 걸까요,,
제가 결혼 전인 2~30대에 아버지께서 저보고, "너는 꼭 농사 많이 짓는 집으로 시집가거라. 그러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왜냐면.. 제가 그런 걸 너무 좋아해서 아버지한테 하듯이 시아버지 따라다니면, 이쁨 많이 받을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회사 다니면서도 아버지 하우스에 유기농으로 심으신 딸기 풀 뽑는 일손이 부족하다 하시어 휴가를 내면서 까지 같이 풀을 뽑으러 다녔습니다. (은근히해본 사람만 아는.. 노동입니다.)
제 하루 휴가비를 돈으로 받는다면, 그 하루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진다면 그렇게 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혼자 하시는 것보다, 제가 따라다니면서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한 것이었네요,,
잘 가꾸어 놓은 명품 하우스를 갈 때마다 제 마음이 얼마나 정화되고 신선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모내기를 하고 아직은 차갑듯 시원한 봄바람을 맞으며 들판에 앉아 점심을 먹는 그 기분. 그 힐링.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지요..
제 아들도 무척이나 그런 걸 좋아합니다.
저는 아버지 - 저 - 아들에게 있어서 그 자연을 유독 사랑하는 그 정서가 내려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들만 봐도 그것은 타고난 것이고 인위적으로 바꾸긴 힘들다는 것도 압니다.
그 정서를 이해하고, 여기를 떠나면 병이 날 것 같다 하시는 아버지를 설득했던 저지만, 왜인지 모르게 먼 훗날 저 역시.. 저만의 그런 정신적 즐거움을 주는 것을 위해 경제적인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 훗날 지금의 아버지를 서희처럼 다시 떠올리는 날이 올 것 같았습니다.
한 개인의 삶은 객관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행이나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모호한가. 가령 땀 흘리고 일을 하다가 시장해진 사람이 우거짓국에 밥 한술 말아먹는 순간 혀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황홀한 행복감이다.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입맛이 없는 사람은 혀끝에 느껴지는 황홀감을 체험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척도는 대부분 하잘것없는 우거짓국과 맛 좋은 고기반찬과의 비교에서 이루어지며 남에게 보여지는 것. 보일 수 있는 것이 대부분 객관의 기준이 된다.
사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은 엄격히 따져보면 삶의 낭비이며 진실과 별반 관계가 없다.
삶의 진실은 전시되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이요 움직이는 것이며 그리하여 유형무형의 질량으로 충족되며 남는 것이다.
제게 예전 추억이 너무나 떠오르게 한 글귀여서 따로 폰에 적어둔 글입니다.
길상이 자기 삶이 얼마나 낭비였는지를 깨다는 장면에서의 글입니다.
부모님이 연로하시게 되면서,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할 그 시기로 저의 초점이 쏠렸었습니다.
한 주 내내 정신 수양을 하듯 그것을 비우는 연습을 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의도적으로요.
갑자기, 아버지와의 농사 추억과 그리고 우리가 느꼈던 그 행복을 그대로 떠올려주게 하는 저 글귀가 꼭 눈물이 나올 것 같이 울렁이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는 은퇴 전까지, 자아와 가족을 위한 선택에서 가족을 위한 선택을 하셨고,
그 이후에.. 자아를 찾아 떠나신 것일 수도 있었겠지요.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인 것이네요..!
17권에서는 보연의 실수로 금붙이를 밀수해서 홍이와 보연이 잡혀 들어가는 일이 나오고, 그 와중에 딱 도둑질을 하려다 들켜버린 임이가 의심을 받는 일이 생깁니다. 알고 보면 임이는 오해를 받은 것인데도, 왜 저는 임이가 미운지 모르겠네요,, 어쩜 너무 죽은 엄마랑 똑같아서, 후기에서도 모르고 '임이네'로 쓸 뻔하기도 합니다. ^^:
양현의 혼처이야기를 가지고 홍성숙과 배설자가 갑자기 서희를 찾아옵니다.
너무나 비대해지고 덕지덕지 느낌이 나는 홍성숙을 묘사한 글을 보고, 얼마 전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은데, 아무리 봐도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아쉽지만, 그 이야기는 17권 완독 후기 때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우연히 하얼빈에서 유인실이 봐주는 심운회의 딸 수앵이 운영하는 운회약국에 조찬하가 들립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잠깐잠깐 등장한 유인실은 하얼빈에서 새로이 태어나길 바랐다 하며 비교적 잘 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찬하를 만나고, 유인실과 오가타 사이에서 낳은 아들 쇼지가 고아원을 간 것도 아니고,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양자로 보내진 것도 아니고, 조찬하 부부가 잘 기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이냐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이 순간 인실이 불쌍하거나 이해가 가기보다는, 화가 날 정도로 인실이 미웠습니다.
그렇다면, 찬하가 받아들일 거라 생각을 못했을 때는, 그 아이가, 한 생명체가 앞으로 겪을 일들이 그런 길이라는 것을 알고도..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를 버리고, 끝까지 배신하지 않은 조선인으로 살려고 했던 것인지? 그것이 고귀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얼마나 무책임한 이기주의였는지?!라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났습니다. 10달 동안 품은 아이를 낳자마자, 다시 태어나기를 마음먹고 하얼빈으로 가서 물론 시간이 지나서였겠지만, 사람들과 저녁식사하고 파티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의 약국을 봐주는 등..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독립운동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면서, 자신의 양심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지키기 위해? 아들을 버리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제 그릇이 인실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겠고, 제가 너무 모성을 우선시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겠지만요,, 그러했습니다.
오가타는 처음 아들의 이야기를 인실에게 듣고, 인실의 뺨을 때립니다.
그리고 곧이어 혼자 걸어 나오면서 가슴 아파합니다. 그 힘든 시간, 아픈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자신 때문이지요.. 그 마음은 또 너무 이해가 갔습니다.
그 시절, 한 남녀이기 이전에 서로를 조선인, 일본인의 틀에 가둬놓고 이렇게 안타까운 결정을 했던 사람들이 실제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저를 돌아보면서도 느끼지만 관념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17권 딱 반을 읽고 후기를 씁니다.
17권 완독을 하게 되면 마저 후기를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