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은 한강님의 모습과 닮은 글이라 생각해요.
다소 생소한 언어인 희랍어가 매개가 되어 매트한 느낌의 소설이지만 결코 메마른 글은 아니었습니다. 잔잔하게 읖조리듯 한강님의 목소리로 서사를 따라가게 되는 글이 꽤 괜찮습니다.
독일로 이민을 갔다가 가족을 두고 혼자 귀국한 남자는 희랍어 강사로 일합니다. 시력을 잃어가지만 학원측에 말을 할수없습니다. 그 강의를 듣는 여자는 이혼하고 딸을 전남편에게 보내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남자의 희랍어 강의를 듣게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첫장을 읽고 산문일지 모른다는 나의 생각은 그런 매트한 느낌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감정의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와중에도 숨죽이며 읽게 되는 글입니다. 묘하게 몰입되는데 왜 그런지 이유가 궁금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젖어들거든요. 아마도 시처럼 특유의 그녀만의 문체가 주는 느낌 때문일지 모르겠어요. 한자한자 읽으면서 남은 부분이 줄어드는 것이 아쉬운 마음이 들만큼 글은 소중하고 예뻤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하나하나 내 손으로 천천히 더듬어 가는 과정처럼 느껴졌어요. 평소 내 머리를 스쳐가는 찰나의 느낌을 모아놓은 종합 세트처럼 느껴졌어요.
그렇게 더듬은 것들은 그대로 마음에 남아 나의 사유를 만들어 가고 그 안에서 슬픔과 기쁨을 만들어가는 과정 같았어요. 읽고 또 읽고 싶은 욕구가 읽으면서도 새록새록 솟아나서 이 책을 끝마칠 때 즈음엔 재독을 바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원하던 글을 만난 기분. 더이상의 글이 필요치 않을만큼 충만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희랍어가 나옵니다.
왜 희랍어를 두 사람의 매개로 정했을까를 생각했어요.
희랍어 강사가 독일에서 배운 언어. 희랍어. 그 언어는 역사 속에 이미 죽은 언어였습니다.
희랍어가 좋았던 건 그 언어가 그에게는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진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선택과 함께 그녀도 같은 이유로 그 언어를 배우고자 했을까요.
그건 모르지만 조금은 상상이 됩니다.
소설 앞부분에 그녀가 어릴때 숲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는 부분이 나와요. 숲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숲이라는 단어가 탑을 닮았고 발음하기 위해 입술을 오무리고 바람이 천천히 새어나오는 느낌을 좋아한다는 말이 나와요. 전 이런게 너무 좋습니다. 아마도 한강 작가님이 혼자 그렇게 해봤던거겠죠. 그렇지 않다면 이런 느낌을 쓸수 없으니까요. 제가 한강님의 디테일이 좋다 한것도 이런 부분입니다. 전 생각만 했지 단어를 어딘가에 적어서 애정하는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거든요. 그걸 끄집어내어준 작가님이 너무 고마웠어요.
소설은 마치 시처럼 구름처럼 작가의 언어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글을 하나하나 꼭꼭 눌러쓴 마음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도 같이 눈으로 꼭꼭 눌러 읽어야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재독이 필요하다 생각했지요.
다시 읽기를 잘했다 생각하는건 문단마다 달라지는 주어와 친절하지? 않은 설명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금방 따라잡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대강의 흐름을 읽고 다시 읽으니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가 정확하게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들 각자가 가지는 외로움과 슬픔을 좀 더 깊이 들여도 볼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죠.
소설은 슬프지만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내용이 아름다운건 결코 아닌데도 말입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말과 소리를 잃어버린 여자 사이에 희랍어가 있습니다.
그들이 희랍어로 소통하는 일은 없었지만 여자는 희랍어로 하고 싶은 말을 적습니다.
생경한 언어가 주는 묘한 매력 때문인지 그 언어가 연결해준 두 남녀의 만남은 굳이 말하고, 보지 않아도 통하는 숨통같은 것이 있어보입니다. 그건 비슷한 아픔이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숨통이겠죠.
'일기장 뒤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꼬챙이 같은 언어들이 시시로 잠을 뚫고 들어와, 그녀는 한밤에도 몇 번씩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신경은 위태롭게 예민해졌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때로 달궈진 쇠처럼 명치를 눌렀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이 입을 열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소름끼칠 만큼 분명하게 들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문장도 완전함과 불완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 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건 그 감정을 느끼지 않고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이란 생각을 했어요. 상상을 해야 조금은 이해할 것같은 이 말은 그녀에게.. 아니 작가에게 문자가 주는 특별한 느낌을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그녀가 좋아했던 문자와 글 그리고 책으로 도배가 되었던 학창시절. 문자는 그런 느낌도 그녀에게 주었구나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남들보다 조금은 더 섬세한 감성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살았고 그것이 문학 작품을 읽는 즐거움으로 퉁치며 살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을 입으로 표현하기도 어려운것이 내 말이 남들에게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작품은 내 생각과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 했습니다. 내 마음을 좀 더 정확하고 다양하게 들려줍니다. 하지만 그건 주로 외국의 고전 소설이었습니다. 제가 한국 소설을 선호하지 않은 이유는 제맘에 드는 작품을 못 만나서 일겁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제게도 한강이라는 작가가 왔기 때문이지요.
'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셀 수 없는 혀와 펜 들로 수천년 동안 너덜너덜해진 언어. 그녀 자신의 혀와 펜으로 평생 동안 너덜너덜하게 만든 언어. 하나의 문장을 시작하려 할 때마다 늙은 심장이 느껴졌다. 누덕누덕 기워진, 바싹 마른, 무표정한 심장. 그럴수록 더 힘껏 단어들을 움켜쥐었다. 한 순간 손아귀가 헐거워졌다. 무딘 파편들이 발등에 떨어졌다. 팽팽하게 맞물려 돌던 톱니바퀴가 멈췄다. 끈덕지게 마모된 한 자리가 살점처럼, 숟가락으로 떠낸 두부처럼 움푹 떨어져나갔다.'
그녀가 이혼으로,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을 잃은 것이 아니었어요. 어느 순간 그녀 안에서 말과 글에 대한 생각이 종지부를 찍었던거죠. 그건 어떤 특정한 사건으로 된건 아니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전 이 글을 읽으며 한강님이 한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해봐요. 그래도 글을 써주셔서 감사하지 말입니다. ㅎ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이건 남자가 한 말입니다.
이 두 남녀는 언어에서 느끼는 공포로 공감을 하는거 같아요. 아무런 접점이 없는데도 그들은 언어로 접점을 만듭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의 아픔으로 서로에게 다가갑니다. 보이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납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그들의 아픔이 얼마나 치유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걸 상상하는 건 독자의 몫이겠죠.
한강님의 인터뷰 내용을 본적이 있어요. 생김새와 그에 어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화법. 이 모든것이 그녀의 소설과 무척 닮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반가웠고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책을 살 용기가 생겨난것 같아요. 나의 예상은 기대치를 훌쩍 뛰어 넘었습니다. 제가 상상만으로 생각했던 상상의 세계와 그것을 섬세한 터치로 표현하는 짜릿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나의 생각을 나보다 더 잘 표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무척 경의로운 경험입니다. 행복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합니다. 추종하고 싶은 만큼의 마음이거든요.
소설은 한강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한강님의 음성 지원이 되는것같은 느낌을 받아요.
글이 작가를 닮았다는 건 아주 긍정적인 일이라 생각해요. 가수가 노래와 닮았을때 더 몰입이 되듯이 작가도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이거든요. 조근조근한 공기가 섞인 음색이 주는 묘한 느낌이 소설을 읽는 내내 배경처럼 깔려 있습니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해요. 인간이 인간다운 건 뭘까, 인간은 왜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야하나, 반면 세상엔 너무 아름다운 것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함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과제 처럼 느껴진다고 말이죠.
그녀가 소설을 쓰는 이유 같았어요. 그 과제에 대한 답을 얻고 싶다는 말이겠죠.
그 답을 찾는 과정을 저도 따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여정에 함께 한다는 생각은 저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ㅎ
딸기님,,! 안녕하세요~~! 넘 반갑습니다. ^^!
저도 오늘 온몸이 쑤시고 떨리고 춥고.. 완전 제대로 몸살이 와서 글도 채 다 못 읽고, 댓글도 못 남겼었네요~
이제야 다시 왔습니다.
지난 주에 이것 저것 굉장히 정신이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제게 닥쳤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쉴 틈도 없고 몸살도 났던 것 같습니다.
오늘 딸기님의 후기를 읽으면서,
첫 번째로는 딸기님의 그 문학적 기쁨이 느껴져서 읽는 저도 흐뭇한 웃음이 나왔고요,, 그냥 어떤 느낌인지는 저도 알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전에 제가 20대 때,, 올려주신 저러한 문장들이 너무 좋았어서,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에 한때 굉장히 빠졌던 기억이 났습니다. 아마 그때까지 나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은 거의 다 사서 읽었던 것 같고, 그런 응축된 시적 표현의 매력을 번역본임에도 이렇게 잘 전달해 주신, 번역가 김난주 선생님께도 펜 레터를 보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굉장히 좋아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추억이 생각나서, 아마 딸기님도 그런 작가를 만나신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더 한강 작가님의 작품들을 탐구하시며 기쁨을 느끼시길 응원 드립니다.!
두번째로는.. ㅎㅎ 아쉬움이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20대 때, 한강 작가님의 작품들을 만났다면 저 역시 굉장히 좋아했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저 역시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만난 한강작가님의 글에서 왜 그런지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솔직히 많이 아쉬웠습니다. 꼭 한국 최초 노벨상 수상 작가라고 해서 좋아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제 코드에 맞아서 (딸기님처럼) 능동적으로 탐하고 기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30대 초반 부터는 밀란 쿤데라, 알랭드 보통과 같은 작가들에 빠졌었는데, 특히 제게 철학이 가면을 쓰고 나타난 듯한 소설의 매력을 알려주는 밀란 쿤데라가 매우 좋았습니다. 당시에 부터 그 이후 퇴사할 때까지 계속 해서 바빴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불어' 인강을 들으며 한동안 불어 독학을 시도했던 것도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그의 언어로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40대 부터는 사회과학에 엄청난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었습니다. 저 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기호를.. 회사의 높으신 분께서 말씀해 주셔서 알았습니다. (항상 사회 과학쪽으로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고요~.)
그런데, 그것이 반갑고 미쳐 지각하지 못했지만 놀랍지도 않았던 것은, 당시에 이미 철학, 심리학을 공부하고 행동경제학을 완성한다면 얼마나 기쁘고 값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러한 이유로, 지금은 저는 이상하게 한강 작가님의 글에서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또 작가님의 그 고급진 특유의 분위기, 어조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그 역시.. 제 스타일은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책과 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궁금한 분이셨는데.. 저는 한강 작가님의 그 인터뷰를 한번도 클릭했다가 끝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ㅜ 왜 그런지 너무 쳐지고 지루한 느낌이 들어서,,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번도 이러한 대화 상대를 본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못 견뎌내겠더라고요,,! 저는 무언가 점점 고조 되고, 명확하게 들리고, 명확하게 들리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빠르게 생각하면서 대화를 따라가고 그런 상대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번에 다름 아닌 한강 작가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ㅜ
그리고 세번째, 마지막으로는 특정 언어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요즘은 개인적으로 참 일찍이 독일어를 배우지 못한게 그렇게 아쉬웠거든요~
이 수 많은 천재 작가, 사상가들의 글을 원어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고 값질까?! 그런 생각을 거의 맨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의 상상할 수 밖에 없는 욕심 이지만 ,아들에게는 영어, 불어, 독일어, 중국어를 각각 몇 년씩 접할 수 있는 그런 기화가 주어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지식과 문장들을 저자의 언어 자체로 읽는 기쁨을 아들 세대는 느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AI 번역이 발달한 시대라 하더라도요..^^: (아들이 지금의 저와 딱 같다면 그것이 너무나 값질 것 같은데, 막상 아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즐길지 몰라서 막연히 그것이 무엇일까가 특히 궁금한 요즘 입니다.)
그런 와중에 희랍어라는 생소한 언어를 매개로 하는 두 남녀의 만남, 남들은 잘 모르는 그들만의 언어로 만나고, 또 비록 그것이(공포) 지만 그 안에서 느끼는 공감대가 있다면 충분히 빠져들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한강님을 잘 모르지만, 개인적인 가정사, 그리고 그 분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그 '채식주의'에 포착 돼, 이 분은 실제로도 채식주의자 이고, 자신이 겪었던 아픔에서 온 그 감정들을 소설의 주인공의 언어로 표현한 것일까?! (아마도 모든 작가가 그러하겠지만요,,) 그런 상상을 하며 읽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딸기님 글에서 아마 딸기님도 그런 추측을 하시며 읽으셨던 것 같아요~.
딸기님,! 글에서 설렘이 막 느껴져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근 두근 하게 만드십니다..!
그렇게 와 닿는 작가를 만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닌데~
정말 원없이 즐기시면 좋겠네요..! ㅎㅎ
섬세하고 정성 스런 후기! 너무나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