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연휴에 간간이 이 책을 다 읽었습니다. 후기는 결국 지금 쓰게 되었네요.
이 책의 후기는 3 단계로 나누어서 쓰려고 합니다. 어려웠기 때문에 이다음에 다시 읽을 때를 위해서 기록해 보고 싶네요. 2,3은 그냥 안 읽고 패스하셔도 될 것 같아요. 개인적 기록입니다. ^^
1. 전체적으로 느꼈던 그대로를 바로 적은 후기.
2. 기억에 남는 문구마다 느꼈던 점.
3. 이해하지 못했거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만 적어 놓은 후기.
《1. 전체적으로 느꼈던 그대로를 바로 적은 후기.》
제가 이 책의 50%까지 읽고 이 책이 데미안에 비해 이해하기 더 쉬운 것 같다고 했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아무리 읽어도 물음표만 나오고 잘 모르겠는 구절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왠지 모르게 목이 메일 것 같은 그런 감동이 느껴져서 5점 만점에 5점을 주었습니다. 저의 쓸데없는 집착일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으면.. 이해를 못 하는 것이 조금 저 스스로에게 아쉽기도 하네요. 제가 헤세의 책을 원 없이 못 즐긴다는 것이 아쉬워요..^^..!
데미안, 싯다르타 모두 총해설을 포함해도 240여 페이지 정도의 작은 분량이지만, 거의 모든 문장을 밑줄을 그어야 할 정도로 밀도 높은 책입니다. 상대적으로 난이도는 더 낮은 듯했던 알랭드 보통, 이문열 작가님의 책들에서도 그랬지만 어떻게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사유하도록 쓸 수 있었는지, 헤르만 헤세라는 작가에게 감동과 놀라움이 느껴집니다.
지지난 주 오이님의 싯다르타 독서 후기를 읽고, 헤르만 헤세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책을 도전하기에는 뭔가 부담스러워서 [데미안]을 먼저 읽었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데미안 하나만으로 헤세라는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고, 데미안 출간 후 3년 만에 출간 한 이 책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데미안에서 느껴졌던 헤르만 헤세의 방황이나 저항, 고뇌 이런 것에 이어서 선교사 집안에서 태어나 선교사의 길을 걷지 못한 자신이나, (데미안에서 그 역할을 했던) 피스토리우스, 싯다르타가 같은 처지였어서 혹시나 매력을 느낀 건가 했습니다. 호기심 어린 기대감으로 이 책을 읽었으나, 저의 예상은 빗나갔고, 데미안 보다 훨씬 성숙하고 안정된 정신을 그린 책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오롯이 알 수는 없지만, 독자로서 제가 느낀 감정입니다.
책의 초반에 내면으로 이르는 길에 대한 깊은 갈망을 묘사한 글들에서는 데미안의 후속작 느낌이 잠시 났었습니다. 싯다르타의 부모님께서 싯다르타를 자랑스러워하는 감정들에서는 제가 아들만 보면 벅차오르는 감정이 느껴져 공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존경하는 아버지와 다른 스승들조차도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다는 결론으로 친구 고빈다와 함께 길을 나서고 자신의 육체가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않을 때까지 참으며 고통에 몸을 노출시킵니다. 왜 그러면서 까지 자아로부터 벗어나고 자신을 멸각시키려 하였는지, 그 깊은 뜻에는 많이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싯다르타는 열반에 이른 고타마도 만나고, 카말라와 사랑에도 빠져 보고, 의도치 않았지만 아들도 생깁니다. 큰 부자도 되어보고 방탕하게도 살아보고, 그리고 반백살 늙은 나이에 다시 속세가 부질없음을 느끼고 뱃사공과 함께 강에서 살며 깨달음을 다시 배워 갑니다.
싯다르타 책에서 크게 감동 받은 부분은 첫 번째, 고타마를 만나 그의 설법을 듣고 곰곰히 생각한 결과,
깨달음은 말로써 전달 될 수 없다는 것, 깨달음은 누군가에 의해서 전달 될 수 없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선택하지 않고 홀로 가겠다는 것, 지혜는 말로 전달하는 순간 그 가치가 훼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40을 넘길때까지 저의 경험들로도 느꼈던 부분인데, 이 책에 나와서 많이 공감이 된 부분입니다.
두 번째, 싯다르타의 윤회에 대한 결정적인 깨달음은 아들로 인해서 얻은 것 같았습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아들을 그리워하고 아파했습니다. 자식을 보내고 강물가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싯다르타에게서 오래전 자신이 이별을 고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아주 오래 전인 젊은 시절에 고행자들한테로 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강요하였던 일하며, 자기가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였던 일, 그리고 길을 떠난 다음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습니다.
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부모의 연으로부터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닐지?
헤세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 부모로부터 강력히 벗어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부모의 사랑은 아이에게는 감옥이 될 수 있으며, 아이에게서는 날아오르며 남겨 두고 싶은 껍데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살고자 하는 대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최종적으로 아이에게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이 좀 더 크고 제가 받아들여야 하지만 되지 않아 힘든 어떤 것이 있다면.. 그때 다시 꼭 이 책을 읽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진심으로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겠네요. 강가에서 자신의 아들과 아버지를 떠올렸던 모습은 거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유독 감동받았습니다.
마지막에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이마에 키스하고 현재의 싯다르타의 미소 짓는 얼굴 뒤로 수많은 열로 이어진 수많은 표정들 아기부터 늙은이의 얼굴, 선량한 얼굴부터 범죄자의 얼굴 그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싯다르타가 말한 깨달음이 이것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싯다르타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라는 것, 시간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미 내 안에 열반에 이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 만물을 모두 그와 같은 시선으로 본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말한 존재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더 이상 자아가 아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었을 것 같고, 고타마와 뱃사공 바주데바에게 서 느껴졌던 완벽한 평온함 고요함은 이것을 깨달은 후의 경지인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왔던 감동이 참 컸었네요. 너무나 감동 적입니다.
(진보양자물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과거,현재,미래가 공존하는 격자 구조가 실제 존재하는 것인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는것인지도 궁금했습니다. )
누구나 절대적 죄인일 수 없고, 누구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다면 누구나 선하고 완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너무나 감탄할 깨달음인데, 또 이 책 하나를 읽었다고 모든 상황에 대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강조하고, 이해를 강조하는 글을 쓴 헤세도 2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글을 읽고,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또는 내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조금 미뤄도 될 것 같습니다. 살며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조금은 신기하게도, 누군가에게 강추! 라고 말하긴 힘들겠지만, 저는 꼭!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입니다.
특히 아이가 사춘기 일 때 우선 다시 읽고 편지를 써주고 싶은 책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헤세의 [유리알 유희] 라는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아래부터는 개인적 기록이니, Skip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2. 기억에 남는 문구마다 느꼈던 점.》
1. 싯다르타는 죽마고우 고빈다라는 친구와 수행길을 나서는데 그때 열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고타마의 무성한 소문을 들었고, 결국 그를 직접 만나 설법을 듣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그때 싯다르타는 누군가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앎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며, 앎은 있지만 배움은 없다고 합니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고, 깨달음은 그 순간 느끼는 것이며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혜를 말로 전달하는 순간 그 가치가 훼손되고 바보 같아진다고요.
그는 마치 뱀이 옛 허물을 벗듯이 한 가지가 자신을 떠나 버렸다는 것을, 젊은 시절 내내 자신을 따라다녔으며 자신의 일부를 이루었던 한 가지, 즉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듣겠다던 소망이 이제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진실로 도를 구하는 자라면, 진실로 도를 얻고자 하는 자라면, 어떠한 가르침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하여 싯다르타는 그때까지의 평생 단짝 고빈다와 헤어지고 홀로 수행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도 공감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경험들로 진정한 배움, 진정한 레벨업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제 수준에서의 경험이지만, 그것의 수업료가 얼마나 비싸고 얼마나 유명하고 와는 관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수업(선생에게 뭔가를 구하는 수업)에서는 실제 혼자서 하는 기쁨의 반의 반도 누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작은 결론이지만 주체적인 사람일수록 수업보다는 스스로 탐구하고 탐색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싯다르타가 그것을 그 한순간 들었던 설법을 되뇌며 깨달았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저는 항상 소설에서 이런 점을 느낄 때마다 작가가 그 와 같은 경험을 했나를 궁금해하는 것 같습니다.)
2. 나는 자주 이 강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으며, 자주 이 강의 눈을 들여다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이 강으로부터 배워 왔습니다. 우리는 강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답니다.
제가 강에 하염없이 귀 기울일 일은 거의 없었지만, 어떤 것이든 하염없이 귀 기울이고 들여다본다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습니다.
회사 일을 할 때, 저는 제가 맡은 일에 의미 부여, 동기 부여 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가치 있고, 배울 것이 있고, 새로움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제 품을 떠나고 시간이 많이 지났던 후배가 연락을 해 왔었습니다. 이제야 선배님이 하신 말의 뜻을 알겠다고요, 어떤 일이든 의미가 있고 배울 게 있고 관심을 기울일수록 뭐든지 새롭게 보인다고요. 조직에서는 꼭 빛이 나는 일만 할 순 없습니다. 그런 일을 한다면, 그 외의 사소하지만 조직에 필요한 일도 맡아서 함께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힘이 들겠지만, 그렇게 나누지 않으면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만 가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저는 조직 운영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 가장 안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리더라면 누구에게라도 경중의 차이는 있겠으나, 동기부여할 일과 그 외의 조직에 필요한 사소한 일들을 나눠서 배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항상 '내가 원하는 메인일을 하면서 조직에 필요한 다른 일도 나눠서 해야 한다.'라는 마인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평소 귀 기울이던 일이 아니어도 일단 그런 일이 제게 오면 그 일의 원래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할 수 있는 한의 성의를 쏟았습니다. 그러면 어느샌가 그 일이 중요한 일이 되기도 하고, 해야 할 일이 참 많은 일이었던 것도 알게 되고, 원래의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리소스가 재분배되며 마무리되었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다시 한번 또 스스로도 의미를 찾게 되고 일에 대한 보람도 생겼던 것 같아요. 평소 그런 생각이 항상 있었는데, 강에서 귀 기울여 배웠다는 싯다르타와 바주데바의 이야기에서 저는 왜 그런지 이 말이 떠올랐네요.
3. 여태까지 어떤 사문이나 어떤 브라만이, 누군가가 와서 자기를 묶어 놓고 자기한테서 학식이나 경건한 믿음, 그리고 심원한 통찰력을 강탈해 갈까 봐 두려워하였던 적이 있었던가요? 아니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자기의 고유한 재산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은 그것들 중에서 오직 자기가 주고 싶은 것만을 주고,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주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내적 자산을 계속 쌓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입니다.
4. (싯다르타는) 카밀라가 한 말을 잊지 않고서, 결코 그 상인에게 종속당하지 않았으며, 그 상인이 부득이 자기를 동등하게 대우할 수밖에 없게끔, 아니 사실은 그 이상으로 대우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싯다르타가 카마스와미 자기의 빵을 얻어먹고 있다는 사실을 싯다르타에게 납득시키려고 하였던 그 상인의 시도도 이렇게 하여 허사가 되고 말았다. 싯다르타는 자기 자신의 빵을 먹고 있었으며,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그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빵을, 모든 사람들의 빵을 먹고 있었다.
주인이어도 함부로 못하는 사람. 주인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이런 말은 요즘에는 특히 많이 공감받지 못하지만, 그래도 큰 상관없습니다..^^;) 누군가나 무언가에 의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닌,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선택인 것이다. '(나는) 언제든 어디서든 이만한 노력과 결실을 주고 이 정도는 받을 수 있고, 다만 그것을 여기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발하는 자신감을 주변에서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이 짧은 대목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5. "저는 빈털터리이지요."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당신이 말씀하시는 의미대로라면 말입니다. 확실히 저는 빈털터리입니다. 그렇지만 그건 제가 좋아한 일이고, 저는 곤궁한 것은 아닙니다."
저도 지금의 일을 시작하기 전보다는 수입이 많이 줄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곤궁하거나 이전보다 풍요롭지 않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거든요. 풍요롭기로는 이전보다 훨씬 풍요롭다고 느껴집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풍요로워질 거라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
6. 외국에서 온 부유한 무역상이라 할지라도 그는 자기 수염을 깎아 주는 하인에게 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대하였으며, 바나나를 팔면서 몇 푼 더 벌려고 속임수를 쓰려 드는 노인 상인에게도 똑같은 대우를 하였다.
평소 지향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7.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와 거래를 트기 위하여 찾아왔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속이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의 속마음을 떠보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의 동정을 사기 위하여, 어떤 사람들은 그의 충고를 듣기 위하여 찾아왔다. 조금은 속아 넘어가 주기도 하였다.
회사와 다르게 바깥세상(특히 온라인)에서는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세상이 그렇듯이 멋지고 좋은 분들의 비중이 제일 많지만, 일일이 이야기하기도 귀찮은 체리피커들, 솔직해도 될 일에 불필요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사람들한테 조금 맘이 상하고 상처(?)가 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아,! 그냥 그러고 싶었던 사람인가 보다. 그냥 내가 그렇게 상처받을 상대가 아닐 수도 있겠다. 하고 넘어가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하면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실제 얼굴 한번 보지도 않고, 그렇게 사람을 혼자 믿고 이야기했다는 것 자체가 웃음이 나옵니다.;; 상처를 받을 일이 있었다면, 그것도 결국 저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점점 더 온라인 세상을 배워 가는 것 같습니다.
8. 당신의 내면에는 당신이 매 순간마다 그 속에 파고들어 가 편안하게 안주할 수 있는 그런 고요한 은신처가 하나 있어.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야. 그런 은신처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되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이야, 카밀라, 바람에 나부껴 공중에서 이리저리 빙빙 돌며 흩날리다가 나풀거리며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 같은 존재야.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숫자이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별 같은 존재로서, 고정불변의 궤도를 따라서 걸으며, 어떤 바람도 그들에게 다다르지는 못하지. 그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그들 나름의 법칙과 궤도를 지니고 있지.
수천 명의 제자들이 날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있고, 매시간마다 그분의 규율을 따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떨어지는 나뭇잎과 다를 바 없는 존재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가르침과 법칙을 갖고 있지 않아.
데미안에서 말하는 그 카인의 표식처럼, 이번에는 저도 이런 안식처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저도 이런 별과 같은 존재이면 좋겠네요. 제 안에 이런 안식처가 있는지 없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요. ^^..!
9.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유별난 존재라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고 느꼈으며, 언제나 그들을 약간 조롱하는 마음으로, 약간 비웃는 듯한 경멸감을 가지고, 그러니까 사문이 속세 사라들에 대하여 변함없이 느끼는 바로 그런 경멸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는 없는데 그들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즉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중요성을 부여할 줄 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저도 꼭 속세를 떠나서 깨달음을 얻는 것 만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그러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하였거니와 지금 아이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제 삶에 중요성을 부여하며 사는 것도 꽤나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헤세의 그 깊은 갈망을 항상 반은 공감하고 반은 공감하지 못하며 읽게 되었 던 것 같습니다.
10. "나는 사색할 줄을 아오. 나는 기다릴 줄을 아오. 나는 단식할 줄을 아오."
가장 비천한 것을 얻기 위하여, 가장 덧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관증적 쾌락을 얻기 위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하여, 부를 위하여 자기는 그 재주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렸던 것이다.
그는 언제나 그 불안감을 새롭게 살려 내려고 하였으며, 언제나 그 불안감을 고조시키려고 하였으며, 그 불안감이 주는 자극을 점점 더 높이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지겨울 정도로 물려 버린 미지금하고 맥 빠진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감정 속에라도 빠져야만 그나마 자신이 행복 같은 어떤 것, 도취 같은 어떤 것, 고양된 삶 같은 어떤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싯다르타가 카와스와미와 일하며 방탕해지고 영혼이 병 들어가는 대목에서는 왠지 ㅜ 요즘의 일론 머스크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 때.. 저는 모두가 상상하기도 힘든 가능성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꿈을 향해 달려왔던 일론 머스크를 동경하였습니다. 일론 머스크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직접 찾아보지 않아서 자세히 모르기도 하고, 그런 여론을 그렇게 믿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요즘은 일론 머스크의 사진만 봐도 뭔가 조금 슬프네요.. 왜 사람이 변해 가면 그것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걸까요. 그의 얼굴에서 이전과 다른 것이 느껴지는 요즘은 조금 슬픕니다. 왜 사람은 순수하고 꿈 많던 시절의 그 고귀한 영혼을 끝까지 지키기가 힘들까.. 그건 것들로부터 완전한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서 함부로 비판도 못하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모두 이룬 사람이 아닐 뿐이지, 제가 안 그런 사람이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그렇게 따지만 참.. 워렌 버핏과 특히 찰리 멍거 부회장님이 존경스럽지 않을 수가 없네요. 돌아가실 때까지 그 고귀한 영혼을 유지하신, 진정한 사색가이자 독서가인 찰리 멍거 님께 존경을 표합니다.
11.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어쩌면 그 길은 꼬불꼬불한 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길은 원형의 순환 도로일지도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
속세의 쾌락과 부가 좋지 않은 것이라고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직접 체험하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두 눈으로도, 가슴으로도, 위 로도 그것을 알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말했다.
싯다르타는 속세에서 질릴 정도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깨달음을 갈구합니다. 실제 자아에 대한 책을 쓴 유명한 작가들도 방탕한 생활은 아니어도 꽤나 깊은 방황의 시기들을 보낸 작가들이 많습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고 호기심과 더불어 인생에 대한 리얼 후기 같아서 소설이 더 재밌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결국 누구라도 어떤 방식으로 살더라도 돌고 돌아 인생을 모두 허비한 후에 깨닫거나, 그러고도 얻지 못하거나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 이전보다는 모든 실패든 성공이든 정말로 값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누군가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 속세에서 나온 싯다르타를 '포기한 사람' '방황을 이겨 내지 못하고 도주한 사람'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런 초연한 인생을 갈망하지만 자신은 그런 유혹을 뿌리치고 계속 한길을 걸어왔다는 것에 또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도 많거든요. 인생은 관점에 따라 너무 다릇 것 같고 그래서 더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 것 같습니다.
12. 그래, 이제 앞으로는 절대로, 예전에는 그렇게 착각하는 것을 좋아하였지만, 싯다르타가 현명하다고 자만하는 그런 착각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이건 꼭 제 이야기 같습니다. ^^: 아주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수록 제가 그동안 봐왔던 세상이 너무나 작고 극히 일부였다는 것을 많이 실감하게 됩니다. 너무나 많은 방법들이 있고, 너무나 다양한 분야에서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걸 느끼기 시작한 지가.. 퇴사 4년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계속 느끼고, 퇴사 후에도 너무나 계속 느낍니다. 심장이 더 뛰고, 더 설레고 재밌는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절로 겸손하게 만들고, 참 낮은 존재인 저를 실감합니다. 그러면서도 남들도 하는데 나도 하지 뭐?! ㅎㅎ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남들이 열심히 하면, 나도 열심히 하면 되고, 나도 분명 나만의 무기가 있을 거야! 하며 살고 있습니다. 모두모두 정말 파이팅입니다...^^!
13.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
부끄럽지만, 저는 위즈덤 플로우가 이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14. 바주데바의 그 경청하는 자세, 진지한 귀 기울임을 배우고 싶다. 싯다르타는 이런 식으로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자신을 고백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다 자신의 인생, 자신의 구도 행위,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꼈다.
바주데바의 그 경청하는 자세를 제가 언제쯤 제대로 실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저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실감합니다.
살면서 몇 안 되는 강의를 끊어서 오프라인 교육을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몇 번의 경험으로 느꼈던 점은, 이 후기의 초반에 썼던, 배움은 말로 얻는 것이 아닌 것. 배움과 터득은 스스로 하는 것. 과 너무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은 듣는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었습니다. 이 늘어지는 말들을 처음에도 듣고 지난번 강의에도 듣고 이번에도 또 들어야 하다니.. 이 지루함으로 보내는 나의 시간이여..! 참 너무나 안타까운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자신의 말을 최대한 아끼고 수강생들이 더 많은 말과 표현을 하고 느낀 점을 응축해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강의를 해야 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저한테 접목해 보면, 글쓰기도 독자들을 생각해야 하는 것. 책에서 같은 내용은 한 번씩 들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고, 너무나 강조하고 싶으면 다른 문장, 다른 사례, 다른 형태의 글로 써야 할 것. 혹시라도 저의 팬이 될 누군가를 존중하는 자세로, 한번 쓴 이야기는 다른 책에서 다시 추억하지 않아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일생에 얼마의 글이나 책을 쓸 수 있을까?! 암담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네요.
만약 헤세의 책이 데미안의 연장선상이었다면, 저의 상상력이, 저의 예감이 적중했다고 좋았을 수도 있지만, 독자로서 그의 다른 책은 다시 궁금해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습니다. 작가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5. "당신이 어린 아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이 그 아이에게는 제발 번뇌와 고통과 환멸이 면제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기 때문에, 당신 아들에게는 그 길이 혹시 면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믿고 있는 겁니까? 그렇지만 설령 당신이 아들 대신 열 번을 죽어 준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 아이의 운명을 눈곱만큼이라도 덜어 줄 수는 없을 겁니다."
사실 그는 여태껏 한 번도 어떤 다른 사람에게 홀딱 빠져서 자신을 몽땅 바칠 수가 없었으며, 자신을 망각할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저지를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그는 그런 일을 결코 할 수가 없었으며,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자기와 어린애 같은 인간들을 구분해 주는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여겼었다. 그런데 어제 자기 아들이 나타나고 나서부터는 싯다르타도 완전히 그런 어린애 같은 인가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바주데바는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싯다르타가 싯다르타의 아들을 윤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다는 것인지 물었다. 가르침을 통해서, 기도를 총해서, 훈계를 통해서? 그렇다. 그냥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외동아들에 대해 우쭐해하는 아버지의 어리석고 맹목적인 자부심, 몸에 달고 다닐 장신구를 얻기 위하여, 그리고 사내들이 자기들을 경탄의 눈길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하여 애쓰는 허영심 많은 젊은 여인들의 맹목적이고도 거친 열망, 이 모든 충동들, 이 모든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들, 이 모든 단순하고 어리석은, 그렇지만 어마어마하게 강한, 억센 생명력을 지닌, 끝까지 강력하게 밀어붙여 확고한 자리를 굳히는 충동들과 탐욕들이 싯다르타에게는 이제 더 이상 결코 어린애 같은 짓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자식을 보내고 강물가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싯다르타에게서 오래전 자신이 이별을 고했던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아주 오래 전인 젊은 시절에 고행자들한테로 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를 강요하였던 일하며, 자기가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였던 일, 그리고 길을 떠난 다음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던 일들에 대한 추억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아버지 또한 자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자기 아들 대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다시는 보지도 못한 채 이미 오래전에 홀로 외롭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이것은, 이러한 반복은,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한 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자기 아버지의 외로운 모습, 자기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 자신의 모습,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에게 그리움의 끈으로 묶여 있는 외로운 모습이었다. 어린 아들의 모습도 나타났는데, 아들 역시 열망에 사로잡혀 자기의 길을 미친 듯이 치닫고 잇는 외로운 모습이었으니, 모두가 스스로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고, 모두가 그 목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윤회에 대한 결정적인 깨달음은 아들로 인해서 얻은 것 같았습니다.
싯다르타가 아들에게 집착하고 아들에 대한 사랑을 꺼트리지 못하고 고뇌할 때, 저 역시 아들을 놓고, 그 어린 아들을 보지 못하고 태연하게 살 수 있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할 것 같지만, 또 그럴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전혀 부럽거나 이루고 싶은 목적도 아니었습니다.
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부모의 연으로부터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아닐지?
헤세는 자신의 삶에서 실제 부모로부터 강력히 벗어나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도 부모의 사랑은 아이에게는 감옥이 될 수 있으며, 아이에게서는 날아오르며 남겨 두고 싶은 껍데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가 살고자 하는 대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최종적으로 아이에게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들이 좀 더 크고 내가 받아들여야 하지만 되지 않아 힘든 어떤 것이 있다면.. 그때 다시 꼭 이 책을 읽고 싶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진심으로 눈물이 흐를지도 모르겠네요. 헤세에게 감동받았습니다.
16. 고빈다가 말하였다. 세존께서 우리에게 지니라고 명한 것은 호의와 관대한 용서, 자비심과 인내심이지, 사랑은 아냐. 그분은 우리에게,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인 것에 대한 사람에 얽매이는 것을 금하셨어.
사랑은 언제나 굴레와 감옥을 오갑니다. 꼭 연인과 가족 아니어도 동료 사이나 친구사이에서도 사랑과 신뢰는 어렵습니다. 무한할 수 있기 위해는 많은 공을 들여야 할 수도 있고, 언젠가 깨지면 그 후가 처참하고, 깨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감옥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마도? 고타마가 용서와 자비심 인내심을 지니되, 사랑은 세속적인 것이니 얽매이지 말라는 것도 이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닐지 생각해 봤습니다.
17.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사랑하는 것, 자기의 눈에 보인 모든 것을 다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감정으로 대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잠을 자는 동안 옴의 작용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매혹적인 현상의 본질인 것이다.
마지막에 고빈다가 싯다르타의 이마에 키스하고 현재의 싯다르타의 미소 짓는 얼굴 뒤로 수많은 열로 이어진 수많은 표정들 아기부터 늙은이의 얼굴, 선량한 얼굴부터 범죄자의 얼굴 그 모두가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싯다르타가 말한 깨달음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싯다르타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라는 것 시간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미 내 안에 열반에 이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우리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안다면 세상 만물을 모두 그와 같은 시선으로 본다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싯다르타가 말한 존재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더 이상 자아가 아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었을 것 같고, 고타마와 뱃사공 바주데바에게 서 느껴졌던 완벽한 평온함 고요함은 이것을 깨달은 후의 경지인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에 왔던 감동이 참 컸었네요. 너무나 감동 적입니다.
누구나 절대적 죄인일 수 없고, 누구나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있다면 누구나 선하고 완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너무나 감탄할 깨달음인데, 또 이걸 모든 상황에 대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랑을 강조하고, 이해를 강조하는 글을 쓴 헤세도 2번의 이혼과 3번의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글을 읽고, 과연 이렇게 될 수 있을까?!, 또는 내 삶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가질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살며시 웃어 봅니다.
《3. 이해하지 못했거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만 적어 놓은 후기.》
싯다르타 앞에는 한 목표, 오직 하나뿐인 목표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것을 비우는 일이었다.
만약 일체의 자아가 극복되고 사멸된다면, 만약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모든 충동이 침묵한다면, 틀림없이 궁극적인 것, 그러니까 존재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 이제 더 이상 자아가 아닌 것, 그 위대한 비밀이 눈뜨게 될 것이었다. (이해를 못 한 문장.)
"침잠이란 것이 무엇인가? 육체를 떠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식이란 무엇인가? 호흡을 멈춘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며, 그것은 자아 상태의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빠져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동안 마비시키는 것이야."
(이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평생에 이런 경험도 해볼 날이 올까?)
나는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단지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 있었을 뿐이며,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단지 몸을 숨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진실로,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의 자아만큼,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별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그토록 많은 생각에 몰두하게 한 것은 없었다.
경이로운 잠에서 깨어난 뒤의 이 찬란한 시간, 온몸이 온통 옴으로 충만한 이 순간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가 그 숱한 세월 동안 투쟁을 벌여 왔던 대상, 언제나 거듭하여 자기를 이겼던 것, 매번 사멸하고 나서도 매번 또다시 살아나, 기쁨을 금지하고 두려움을 느끼는 바로 그것, 바로 자신의 그 작고 불안한, 자만에 찬 자아가 죽은 것이 아닐까?
이곳 숲 속에 자리 잡고 잇는 사랑스러운 강가에서 마침내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자기가 지금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토록 확신에 넘쳐서, 이토록 두려움 없이, 이토록 기쁨에 가득 차 있는 것은 바로 그 자아의 죽음 때문이 아닐까?
마치 강물이 자기에게 들려줄 어떤 특별한 이야기가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아직 알지 못하는 그 특별한 이야기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강물 속에 싯다르타는 빠져 죽으려고 하였었다. 피곤에 지치고 절망에 빠진 그 옛 싯다르타는 이 강물 속에 오늘 빠져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싯다르타는 이 흘러가는 강물에 깊은 사랑을 느꼈으며, 그 강을 다시 곧바로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당신도 그 비밀, 그러니까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비밀을 강물로부터 배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즉시, 인간이 그 시간이라는 것을 없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즉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힘겨운 일과 모든 적대감이 제거되고 극복되는 것이 아닌가? 그는 무아지경에 빠져 말을 계속하였다.
자기 아버지의 외로운 모습, 자기 때문에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 자신의 모습,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에게 그리움의 끈으로 묶여 있는 외로운 모습이었다. 어린 아들의 모습도 나타났는데, 아들 역시 열망에 사로잡혀 자기의 길을 미친 듯이 치닫고 잇는 외로운 모습이었으니, 모두가 스스로의 목표를 향하고 있었고, 모두가 그 목표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모두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누군가 구도를 할 경우에는." 싯다르타가 말하였다. "그 사람의 눈은 오로지 자기가 구하는 것만을 보게 되어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으며 자기 내면에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결과가 생기기 쉽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은 오로지 항상 자기가 찾고자 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는 까닭이며, 그 사람은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까닭이지요. 구한다는 것은 하나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찾아낸다는 것은 자유로운 상태, 열려 있는 상태, 아무 목표도 갖고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된다 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따금씩 예감했으며, 이 때문에 내가 그 스승들 곁을 떠났던 거야.
내가 깨달은 최고의 생각이란 이런 거야.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자면 이렇네.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이해를 못 했고, 어렵게 느껴지는 문장.)
싯다르타는 말을 불신했다.
나는 그분의 위대성이 그분의 말씀, 그분의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행위, 그분의 삶에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 그런 것이다. 끝장을 볼 때까지 고통을 겪지 않아 해결이 안 된 일체의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며, 똑같은 고통들을 언제나 되풀이하여 겪게 되어 있는 법이다.
싯다르타가 바주데바에게 하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붓듯이,
(고등학교 시절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하염없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그 친구는 아주 가끔 이곳을 에 온다. 하지만 너무 가끔 와서 지금 이 후기에 있는 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다. 그리운 내 친구.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그때의 우리는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감사의 일기》
1. 명절인데 처음으로 자유 시간을 준.. 남편한테 감사하다. 생각만큼.. 일을 열심히 못했지만 ^^:
(너무 여유로워서 집중이 안됨..) 추가로 생긴 보너스 기간이란 것을 뇌가 아는 느낌이지만 참 삶의 질이 높아진 느낌이라 감사하다. 얼마 만에 자꾸 유튜브를 보며.. 내 취향인 한국에 있는 미국식 주택들을 감상하며 또 설레하고 있었다.
2. 코로나에 걸리신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가고, 엄마와 함께 어마어마한 양의 만두를 해서 누나들에게 갖다 준 남동생에게 감사하다. 손은 꼭 곰 손처럼 두껍고 투박한데 어쩜 이렇게 만두도 잘 빚고 요리를 잘하는지..! 참 신기하고 귀여운 동생이다. 너무너무 감사하다.!
3. 2024년의 목표를 꼭 이루자.! 2월에 할 수 있는 것을 또 충실히 하고, 3월에 할 수 있는 것을 또 충실히 하자.! 준비가 되기 전에 알리는 일은 그냥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을 잊지 말자. 목표와 동기부여로 충만한 내 삶에 감사하다.
노트북님~ 후기가 넘 감동입니다. 좋은 글귀가 많아 몇칠동안 틈틈히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저는 외동으로 자라면서 항상 부모님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이 부담으로 작용해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를위해 헌신해주신 부모님의 사랑은 보답해야 한다는생각에 서른살까지 부모님에게 내가 모은 모든것을 주고 떠나 그 이후 나 혼자 새로시작하는 삶을 시작하자라고 생각하며 20대를 보내왔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철 없기도 했던 생각같지만 그때는 사뭇 진지했네요. 때문에 회사도 악착같이 다녔던것 같습니다.
막상 서른이 되고 부모님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ㅎㅎ 그 때부터는 제 자신을 알고싶다는 생각을 많이하며 제가 좋아하는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했던것 같네요. 그러다 보니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으면서 마음이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부담보다는 고마움으로 변했고 이제는 연약하게 변해버린 모습이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네요. 😭
아직도 철 없는 딸이자 엄마이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는 제 모습도 여러 생각이 드네요~
싯다르타 자세한 내용은 잊었는데 저도 다시금 읽고 책에 구절에 대한 내 마음과 생각을 적으며 현재의 내 상태를 알아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
20살에 서른즈음에 노래를 듣는 느낌으로 노트북님에 글을 읽었어요.
시간을 벗어난 다는 것
자식이 내맘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 내 집착으로 어떤 것고 벗어날 수 없을 꺼라는 것
앞으로 나를 옥죄는 것들을 싯다르타에서 찾을 수 있겠어요
감사해요
우와! 어찌 이리 글을 잘쓰시나요,,?!!
제가 싯다르타를 보며 느꼈고, 리뷰로 남기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꽉꽉 담겨져 있는 느낌입니다.ㅎㅎ
너무 완벽한 싯다르타 리뷰입니다! ㅎㅎ 더군다나 5점까지ㅎㅎ
저도 비록 데미안은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도전할 수 있을까 의문이지만ㅠ
싯다르타를 읽고, 그나마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게다가 대장님도 강추(?) 해주신 책이니깐요.ㅎㅎ
제 리뷰를읽으면서 뭔가,,
제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이 물씬 풍기지 않는 게
조금 허전하고, 아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장님의 리뷰를 보니 비로소 글로써 싯다르타의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리뷰 넘넘 잘읽었습니다!^^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