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5권에는 간도로 이주하고 낯선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삶이 그려집니다.
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떠나온
이들의 힘든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작은 희망을 품고 고생을 달게 하는 이도 있고,
또 누구는 밀정이 되어 같은 조선인의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이도 있고,
남의 땅에서라도 같은 조선인끼리는 서로
돕고 살아야겠다는 신념을 가진이도 있고,
서희는 고향에 가서 복수를 하겠다고 꿈꾸며
할머니가 숨겨주신 초기자본으로 부를
축척하며 자존심을 꼿꼿이 내세우고
강인하게 현실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5권에서 저는 '교육'과 '정'
이 두가지 키워드에 관심이 갑니다.
'교육'은 아무리 나라가 없어져도 그 나라를
되찾을 인재가 있다면 언젠가 다시
나라는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낯선땅에서도 학교를 짓고 어린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하고자 했던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가 없어지지 않고
독립운동가를 길러낼 수 있었고,
나라를 되찾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같은 교육을 받았어도
나라를 위하는 이가 있는 반면
개인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이도 있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론자도 있지만,
결국에는 행동하는 지성인과
그 지성인을 믿고 돕고 따르는 선량한 백성이
있었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정'은
서희가 아무리 가진것이 많아도
계속 베풀기만을 바라는 이들에게 반감이
드는 이유는 자기도 누군가에게는 보살핌을
받고 '정'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자신은 어려운 이웃을
돌보지 않으면 욕을 먹는 처지이고 보니,
조금은 속상했었나 봅니다.
그러나 서희는 할머니 윤씨부인처럼
속깊은 정을 표현할 수 있는 성숙함이
아직은 없는듯 합니다.
정을 나누기보다는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나봅니다.
첫정을 상현에게 받고 싶었으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여 그 속상함을 의남매를 맺어
길상과 혼인을 성사시켜 달라는 부탁으로
하는걸 보니 말입니다.
그리고 길상도 서희에게는 순수한 정을
주기에 너무나 큰 산이라고 생각하여
옥이네에게서 느끼는 정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람이 서로 순수하게 정을 주고 받으려면
어떤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야만 하는걸까?
의문이 드는 시점입니다.
나보다는 조금 연민이 느껴지는 이에게
정을 줄 확률이 높은건가?
나 보다 처지가 나은 이를 보면 어쩌면
조금은 위축되고 나의 작고 순수한 마음이
잘 전달되기 힘들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소설을 읽으며 듭니다.
또 다른 한편에는
이 5권 말미에 길상이 윤씨 부인과
최치수에게서 느끼는 정이 나옵니다.
그들은 길상보다는 현실적인 부는 나을지언정
그들의 인간적 슬픔에서는
그들도 깊은 슬픔을 알고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이 있었기에
그들에게서 만은
순수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윤씨 부인과 서희의 어떤점이 다른걸까?
아직 서희는 어려서 타인의 입장에서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서일까?
좀더 나이가 들고 서희도 이세상의
슬픔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 슬픔과 타인의 슬픔을 함께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윤씨부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서희의 성장과정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까 주목되는 시점입니다.
(길상은 윤씨 부인에게서 정을 느꼈으나
아들 최치수는 모정을 느낄수 없었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선택적 정' 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른 정' 인가?
인간의 이해하기 힘든 깊은 내면을 접근하게
하는것 같습니다.)
토지를 읽다보면 드는 생각은
작가가 글을 너무나 서정적으로 쓰셔서
읽으면 읽을수록 박경리 작가의 글에
매료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스토리가 주는 힘도 있지만,
저는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운것 같습니다.
천천히 읽어도,
연속적으로 읽지 않아 스토리가 끊겨도,
결코 지겹지 않고 문장들에 이끌려서
제가 토지를 읽으며 질리지 않고
계속 읽게 해 주는것 같습니다.
읽을수록 더 깊이가 느껴지는 소설입니다.
글여행님~ 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연휴에도 책을 마무리하고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연휴로 후기를 올리는 것이 의무사항이 아니었음에도 이렇게 회원들의 마음이 통하는것이 참 좋습니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거 같습니다.
이것도 넓은 의미의 정이 있어 가능한 일 아닐까 생각합니다. ㅎ(막 갖다 붙입니다. ㅋ)
글여행님의 글은 모두 공감했습니다.
교육도 그렇고 정에 대한 얘기도 그렇구요.
노트북님의 말씀처럼 정에도 상대적인 감정이 생기는건 인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이기에 작은 행동에도 마음을 다치고 그래서 상처도 더 크게 받는것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가까운 사람일수록 세심한 말과 행동이 뒤따라야 된다는 생각을 전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을 곁에 두고 싶으면 적절한 간격을 두고 관계를 맺기를 선호합니다.
이것을 가족간에도 적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요즘 전 하고 있답니다.
가족도 마냥 좋을 수가 없는 것이 너무 밑바닥까지 보기 때문인것 같아요. 하지만 핏줄이기에 다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되는 관계라 참 소중한 관계가 맞겠죠.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었네요. 올해도 우리 잘 지내 보아요ㅎ
글여행님, 반갑습니다. 어느덧 벌써 5권을 읽으셨네요,,!
저도 그쯔음에서, 교육의 중요성과 '정'에 대해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길상은 윤씨 부인에게서 정을 느꼈으나 아들 최치수는 모정을 느낄수 없었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요?
'선택적 정' 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른 정' 인가?
이 대목에서 순간적으로 생각난 것은, '정'을 주고 받는 대상과 나의 '관계에 대한 상대성'과 그 정을 주는 사람의 '상황(형편)에 대한 상대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치수가 몇 달을 떨어진 어머니를 기다리며 그렸던 그 정은 '모자간'의 정이었던 것이겠지요.
그 정이 그렇게 그리웠는데, 달려가서 안기고 싶었던 어머니가 자신을 보자마자 뒷걸음 치는 그 냉정함에 상처를 받았던 것일겁니다. 하지만 길상은 '주종의 관계'에서 (다른 하인들과 다르게) 유독 자신에게만 배움을 지원하고 은혜를 베푼 윤씨부인께 감동을 받았을 것 같고요.
위에서 말씀 하신 서희의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의례 상대의 형편에 따라 암묵적으로 그들의 베품에 대해 기준선을 정하기도 해서 그런 류의 상대성도 있을 것 같습니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 에서도 (정확한 액수는 기억나지 않치만) 친척에게서 거액의 금액( 예를 들어 10억)을 물려 받고도 물려준 친척을 욕하는 사람을 보았냐 했던 기억이 납니다.
알고 보니, 죽은 친척의 재산이 어마어마했던 사람인 것입니다. 나머지를 모두 환원하고 겨우 자신에게는 10억만 물려준 친척을 원망한 것이었죠. 이 경우도 비슷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저희가 [토지]를 읽으며 짠했던 이유중에 하나도.. 서로가 그렇게 없는 살림에도 만나면 떡이라도 사먹이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짠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 중 이런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이 얼마나 보답해야 하는지 보다는, 상대의 형편이 어떠한지를 감안해서 보답을 하는 경우 입니다.
예를 들어, 많이 고마운 분이지만 상대가 유독 넉넉하다는 이유로 물질적 보답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되는 반면에, 어려운 처지의 분들께는 별일 아니어도 무언가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그런 류 일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부자여도, 자신의 돈으로 뭐든 사고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자신이 챙긴만큼, 축하해 준 만큼) 축하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어려운 살림에 매번 마음만큼 챙길 수 없는 형편은 충분히 이해해 주겠지만, 그 반대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도 정말 공감이 되었습니다.
다만, 잔나비의 노래 중에, "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거야."
라는 말처럼 어느 순간 너무 현실적이 된 저를 느낄때도 있었거든요.
저는 필요 이상의 저렇게 사람을 고취시키는 말이 어쩌면 상당히 무책임한 말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당시의 독립운동에 대한 현실적인 벽을 인정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의 작은 돈, 그 형편 없는 무기들로 일본을 몰아낼 순 없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고 힘을 기르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에는 일말의 의심도, 회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저마다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길렀다는 것에서는 현재의 투쟁과 함께 미래의 투쟁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운 시기에도 양 방향으로 애쓰셨던 당시의 독립투사들의 활동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회의론자도 있지만,
결국에는 행동하는 지성인과
그 지성인을 믿고 돕고 따르는 선량한 백성.
위에 글여행님께서 말씀 하시는 회의론자도 이해하고, 행동하는 지성인과 선량한 백성도 응원하고,지지하는 마음입니다.
덕분에 이전에 읽으며 거의 똑같이 느꼈던 그런 감정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 해 보았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주말도 잘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