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노트북 입니다.!
1월 독서 모임 마지막 주 3일 동안 이 책을 완독 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제가 중2 때 아버지께 "오늘 데미안을 다 읽고 왔다."라고 말씀드렸을 때, 저를 보시며 웃는 얼굴로 말씀하신 첫마디였습니다. 모두가 데미안 하면, 떠올리는 이 문장을 저는 당시에 그냥 대충 흘려 읽었던 거예요. 그날 제 머릿속에는 싱클레어를 괴롭혔던 프란츠 크로머의 이야기와, 데미안이 어떻게 그를 무찌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데미안의 어머니를 사랑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에바 부인'으로 불렀다는 그것이 놀랍고 인상 깊었습니다. ^^: 아버지의 첫 말씀에, 저는 제가 책을 제대로 탐독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집에 오면서도 이게 그토록 유명한《데미안》인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왜 이게 그토록 추천할 만하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지, 느낌이 없었어요. 아버지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말씀하셨는데, 다 저는 깊은 감흥을 받지 못한 부분들이었어요.. ^^..! 그래서 그런지 그 이후에도 항상 데미안 이야기가 나오면, 읽었으나 읽었다고 말하기가 참 모호한(?)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언젠간 꼭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 생각했는데, 근 30여 년이 다 되어서야 다시 읽게 되었네요.
"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 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지금 이 책을 다시 읽을 때도 저는 이 말이 제 마음속에 와닿았습니다. 하지만,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라는 말보다는, 끝에 있는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이 말 때문입니다.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을 모두 포함하는 신입니다.
평화와 질서, 안식이 존재한다는 것, 의무와 거리낌 없는 양심, 용서와 사랑이 존재하는 경이로운 곳.
제가 자라온 저희 집도 밝고 올바른 세계에 속했습니다. 저는 저를 둘러싼 모든 것을 사랑했고, 제 삶에서 제가 기억하는 한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대학 시절 핸드폰 메인 화면에 "나는 우리 아버지의 딸이다."라는 문장을 넣고 다닐 정도로 제 삶에는 자부심과 사랑이 있었고, 나머지 세상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잘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선, 고귀함, 아버지다움, 아름답고 드높은 것 이런 것들이 세상을 차지하는 건 반일 뿐이라고, 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머지 반은 그저 악마한테로 미뤄진다고 말합니다. 헤세의 말대로 절반이 통째로 숨겨지고 묵살되는 것이죠.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해 봅니다. 이건 제가 자연히 살아오면서 느꼈던 점인데, 왜 부모님은 분명 나머지 반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을 텐데, 유독 한쪽(밝은 쪽)의 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셨을까..?! 그냥 제가 이만큼 나이가 들어보니 생기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파울로 코엘료의 책에서도 말한, 부모가 알려주려 하지 않은 나머지 세상에 대해 그 자식이 홀로 감당하며 가져야 했던 원망에 대해 조금은 공감이 갔었습니다. 이제는 특정 작가를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아와 세계에 대해 고민했던 어떤 책이라도 이 내용을 언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그 반대급부에 대해 느꼈던 건 다름 아닌 회사에서였습니다. 회사에는 매우 밝고 선한 것도 있었고, 그 반대(정치, 부패, 파렴치)도 존재했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그걸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런 세계를 조금 더 일찍 알었더라면, 비판적, 선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내면의 기준을 외부에 드러내지 않고 세련되게 관리하는 법을 조금 더 일찍 터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물론 성향상 그러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도덕적으로 전혀 동조가 되지 않는 리더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제 자신의 문제 하나로도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역할을 같이해야 하는데서 밀려오는 고통이나 저항이 심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걸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정말 컸던 것 같아요. 결국 그렇게 누군가에게 갈 피해를 눈감고 함께 전가해야 하는 기득권이 되어야 할 때 그런 걸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차라리 불이익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겉보기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어도, 그런 것에 동조하고 충성할 수 없는 사람으로 눈밖에 난다는 것도 불이익 일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공식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더 많은 수고와 노력을 감당해야 하는지도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엄청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이야기도 아니고, 그런 것들로만 얼룩진 곳이 회사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맞는 결이 있는 것 같고, 또 저도 결이 맞는 분들과 함께 할 때는 분명 좋았던 기억도 많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건 저만 겪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일입니다. 이 책에서도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 모든 것은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요, 그냥 세상의 반이 그것이니까요.
헤세는 어쩌면 조금은 반골적인 성향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솔직하고 너무 맞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성장기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여져야 할 사실에 가까운 내용들도 비판을 거친 후 조건부 수용을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는 종교에서의 모순에 대해서도 일찍 깨닫고 그것을 행해야 하지만 행할 수 없었던 데서 오는 고뇌가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저도 최근에 이런 책들을 읽고, 스스로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된 건데 저 역시 그런 성향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모습입니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저에 대해서도 더 생각을 해보게 된 것 같아요.)
"사람들이 신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로 기리면서도 생명이 근거하는 성생활은 간단히 묵살하고 어쩌면 악마의 일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존경하고 성스럽게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해. 인위적이고 분리시킨 이 공식적인 절반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를 말이야."
어쩌면, 이 책에서 말하는 절반의 세계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에서 말한 '키치의 세계'와 같은 맥락일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2014년 겨울에 그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을 읽었습니다. 밀란 쿤데라가 키치의 세계를 말하려고 한 이유는 아마도 '공산주의라는 키치'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저는 당시까지는 전혀 키치의 세계에 대해 인식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것에 대한 깨달음이 매우 신선하고 뜻깊었던 기억이 납니다. 키치는 미학적 이상입니다. 키치는 자신의 시야에서 인간 존재가 지닌 것 중 본질적으로 수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제합니다. 철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름다움만 남기고 그 뒤에 당연히 존재하는 더러움은 마치 없는 것처럼 처리하는 것이 키치입니다. 키치를 가장 잘 행하는 사람들이 정치인이라고 하네요.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말이 그토록 감명 깊었습니다. 뭔가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얻은 느낌이었거든요.
사람들은 카인의 자손들이 무서웠어. 그들은 '표적'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표적을, 그것의 원래 모습인 우월함에 대한 표창으로 설명하지 않고 반대로 설명한 거야. 사람들은 말했지. 이 표적을 가진 녀석들은 무시무시하다고. 도 그들이 실제로 그렇기도 했어.
데미안과 싱클레어가 나누는 대화에서 말하는 그 세상의 어두운 면에는 위의 내용도 함께 포함하는 것 같아요. 이것도 사회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교육을 받아와서 인지, 제가 원래 그러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질투가 잘 없습니다. 그냥 멋진 사람, 잘하는 사람, 노력으로 무언가를 얻은 사람을 보면 인정하고 박수를 쳐주고 싶거든요. 그리고 질투보다는 저도 그렇게 되고 싶고,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고 싶어 집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잖아요. 자신이 노력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가떨어지게 고의로 태클을 걸기도 합니다. 의외로 남을 질투하거나 태클을 걸고 무언가를 나쁜 쪽으로 계획하는 사람 중에는 못난 사람보다는 자신도 잘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매우 신기한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다 쳐내야 내가 혼자 남는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의중은 본인만 알겠지만, 그냥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선의의 경쟁을 하는 이상적인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분명 카인의 표적을 가진 자라고 느껴지면 생존 본능이 발동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과 동급의 라이벌이 아닌, 자라나는 후배들, 아랫사람들까지로 보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한 사람의 부류로 보고, 또 이제는 생존하려면 당연한 처사로 까지 여겨지지만 그것에 눈을 뜨기까지 참 신기하게 그런 사람들을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대목에서 그런 것에 대한 공감 보다도, 그냥 제가 저 카인의 표적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냥 무척 탐이 나네요. ^^;!
카인에 대한 관점에 이어서, 저는 헤르만 헤세의 깊은 고뇌로부터 왔을 이런 반항적 기질이 나쁘지 않습니다.
(성서의 두 도둑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그는 죽기 전에 지옥 가기 싫고 천당 가고 싶어서 회계하는 것보다 끝까지 살던 대로 살고, 회계하지 않는 사람이 더 개성 있고 매력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종교는 없지만, 이 말에 꽤나 동의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그들 모두가 그들의 삶의 법칙들이 이제는 맞지 않음을, 자기들은 낡은 목록에 따라 살고 있음을 느끼는 거야.
"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러기가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와닿은 문장 하나를 굳이 꼽으라면, 지금은 이 문장을 뽑을 것 같아요.
아직까지는 이 글귀가 회심의 미소로 바라봐지네요.
이곳에서는 동화가, 꿈이 살았다. 그리고 그렇다고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 사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과 대화 가운데서 자주 그 세계 한가운데서 살았다. 다만 우리는 다수의 다른 사람들과 어떤 경계선에 의해 갈라져 다른 벌판에 있는 것이아니라 오로지 다르게 바라봄에 의해 갈라져 있었다.
음,, 저희 형제가 시간일 지날수록 풀리지 않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여기서 표현해 준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어떤 면에서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다르게 바라봄"이 그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르게 바라봄은 곧, 호기심과 의문을 가진다는 것 같아요. 헤세에게 공감이 되는 면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느 세계나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순리' 같은 건 없다고요. 무언가에 대해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고 골똘히 생각해 본다는 것. 그것이 헤세에게 느껴지는 동질감과 같은 공감 포인트였습니다.
이 책을 읽고 헤르만 헤세에 대해서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헤르만 헤세는 85세를 살았고, 39세에 이 책을 썼으며, 42세에 이 책을 출판했네요. 유명한 작가들이 때때로 그러하듯이, 이미 명성을 얻은 헤세도 작품으로만 평가받고 싶어서, 이 책을 가명으로 출판하는 실험을 했네요.
헤르만 헤세는 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철학, 종교, 정의와 같은 이념들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했다고 합니다.
종교에 대한 이념들을 지켜나가는 것이 가문의 의무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광기에 가까운 창조의 열정을 누를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그래서 실제 그는 신학교에서 뛰쳐나오고, 자살을 기도하고, 일반 학교에서도 퇴학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의 상황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도 생생히 묘사되었다고 하지만, 싱클레어의 고등학교 방황기 시절도 그렇게 그려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비슷한 케이스인 파울로 코엘료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습니다.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글쓰기를 좋아했던 파울로 코엘료도 청소년기는 결국 우울증과 분노의 연속이 되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위해 세 번이나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소설에 투영한 것이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그 방황의 시기에 고민했던 것들을 데미안, 피스토리우스의 대사들로 녹여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무릎을 탁 칠만한 명쾌하고 새로운 개념들을 쓰려면 그만큼 그것에 대해 고민을 했어야 할 테니까요. 점점 명작들과 작가들의 삶을 함께 보는 것이 즐거워집니다. 작가의 삶과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한 문장 한 문장이 소중한 책입니다. 소설치고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이 책을 퇴고하기 위해 헤르만헤세가 얼마나 큰 열정으로 심혈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 문장 한 문장 허투루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어렵기 때문에 아직은 제가 이 소설을 다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40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말하는 그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에 대한 고통과 고뇌에 그렇게 까지 공감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냥 이건 조금 아쉬울 따름이네요..! 제 인생의 깊이가 이 책에 감동을 받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저의 평점은 4점입니다. 또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나서야 이 책을 다시 읽어볼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그때는 저의 평점도 더 높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이 책을 소화할 수 있는 여러 분야의 배경 지식부터 삶에 대한 고민과 통찰도 좀 더 공감 할 수 있길 바랍니다.
40대에 다시 읽은 데미안의 후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1월에 함께해 주신 독서모임 회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이제는 혼자서는 읽는 재미가 너무 덜 할 것 같네요 ^^:
또 언제라도 여유가 되실 때 다시 함께 할 수 있길 바래봅니다. ^^
노트북 드림.
《감사의 일기》
1. 동생이 바빠서 부모님 집에 혼자 가 있는 조카가 오늘 너무 심심하다고 데릴러 오라고 두번이나 전화가 왔다. 평소보다 일찍 정리하고 부모님 집에 가서 조카를 데리고 우리집으로 왔다. 내 아이를 낳고도 한동안 나는 정말 조카랑 내 아이가 똑같이 좋을 정도로 조카에게 푹 빠져 있었다. 얼마나 이뻐했는지 모른다. 이모집에서 자고 싶다고 해서 아이와 함께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 계속 함께 놀았다. 평소에는 아이가 하나 였는데 둘이다 보니 재밌게 노는게 더 귀여워서 사진을 많이 찍었다. 정신도 조금 없다..^^..:
(1월 독서 후기 마지막 날이고,, 데미안 후기를 정성을 들여 저녁에 쓰고 싶었는데, 뭔가 많이 피곤하다..^^..!)
그래도 오랜만에 조카와 소중한 추억을 쌓게 되어 감사하다.
나이 70을 지나
열여서~일곱 어린시절에 "데미안"을
읽은지가 반백년이 지나고보니 머릿속엔
모든 기억이 희뿌연 회색빛 뿐 입니다.
분명 그 당시엔 큰 깨달음도 받고 또 그 나이에
이해되지 않는 철학적 심오함도 있었지만
훗날 사회생활 하면서 주변인들과 갑론을박
담소를 나눌때면 나름대로 破戒(파계)를 통한 깨달음과
가치관을 주장하며 때때로 인용도 하곤 했지요
청소년 시절에 느끼고 보았던 세상과
나름 인생여행의 마무리 단계에서 보는
"데미안" 어떻게 다른지 다시한번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