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노트북 입니다.
이 책 중간 독서 후기 쓸 당시 새벽에 90페이지 까지 읽고 중간 후기를 남겼는데요, 확실히 완독 후기와는 차이가 있네요~.
책은 당시 이어서 바로 완독을 했습니다. (바로 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빨리 독서 후기를 쓰고 싶었는데, 어찌 어찌해 늦어졌습니다. 일상에서 글쓰는 짬이 잘 안나서 아주 조금씩 썼는데, 그러다 보니.. 제가 느꼈던 감동을 잘 전할 수 있을지 조바심도 생깁니다.
중간 후기를 쓸 때도 저는 뫼르소라는 인물에게 연민도 느끼고, 왜인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두 사람 (뫼르소와 그의 연인 마리.)에게 좀 행복한 미래가 찾아온다면 좋았을텐데.. 하면서 읽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 순수했던 이 두 사람에게 이런 엄청난 불행이 닥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네요.
하지만 중간 중간 조금은 의아하고 이해가 가지 않았던 뫼르소의 어떠한 면들은 완독을 하니 더 많이 이해 할 수 있었고, 답답하고 이해가 안갔던 부분도 뫼르소의 어떠한 면이 이렇게 파생되게 했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 솔직함.에 대해서는 고귀함도 느껴지네요.
《이방인》은 엄청난 소설인 것 같습니다. 저는 까뮈의 《페스트》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그 또한 정말 대작이 아닐까..! 짐작 하게 합니다. 왜 알베르 까뮈가 그토록 찬사를 받는 작가인지도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어렴풋이 라고 표현한 것은, 뭔가 세상에 대해 이렇게 절묘하게 눈치 채지 못하는 기법으로 고발한다는 것이 천재성이 느껴지면서도 제가 그것을 다 온전히 느끼지는 못하고 있기 때문에 '어렴풋이'라고 표현을 하게 되네요.
책을 읽다 보니, 어떤 작품 (문학, 그림, 음악 등 모든 예술)에 대한 찬사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멋진 작품들, 저와 세상을 돌아볼 수 있는 이런 작품들을 제가 너무 늦게 접한 것이 아쉬울 따름이네요..!
인생의 시기마다 유독 좋아하는 장르들의 책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세계 문학 전집을 읽을 때면, 항상 좋아했으면서도 많이 읽지 못했습니다~. 아들에게 더 더 좋은 것을 많이 주고 싶은 이 시점에 앞으로도 문학에 한동안 더 깊이 빠져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마음을 더 풍요롭고 깊게 해야,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 같아서 입니다.
책의 주인공은 뫼르소 입니다. 책의 표지에도 나왔듯이 선박 중개원으로 일하는 뫼르소라는 청년은 어느날 양로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장례식을 치르고 옵니다. 여기서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모친상과는 너무 다른 듯한 무미 건조한 뫼르소를 보게 되고, 그는 또 얼떨결에 살인을 저지르게 됩니다.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에도 변호사나 법정에 그렇게 자신을 변론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초반에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후에는 자신에게 유리한 변론 보다는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세상도 뫼르소에게 무관심 했지만, 뫼르소도 세상에 무관심 했습니다. 그러다 사형 선고를 받고 난 이후 간절히 새로운 삶을 원하지만 소설은 그걸 이루어 주지 않고 마무리 합니다.
저는 책 초반만 해도 너무 무미 건조한 사람 아닌가?! 라고 생각했고,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안 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제가 왜 뫼르소가 싫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왜 그리. .뫼르소와 마리에게 그런 불행이 닥치는 것을 슬퍼 했는지 더 이해가 갔습니다.
먼저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몇 가지 의문점과 주안점들이 있었습니다.
1.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태양 빛 양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 뫼르소의 연인 마리는 어떤 사람일까? 뫼르소는 진정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3. 재판 과정이 왜 이렇게 충격적으로 느껴질까?
4. 왜 뫼르소는 이렇게 세상에 무심하게 되었던 것일까?
< 1. 소설속 태양 빛의 변화는 무얼 뜻할까? >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어느 구절에서부터 태양 빛이 '자유'를 의미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제가 굳이 스토리를 만들자면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면서, 실제로 작가가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뫼르소는 어머니를 편안히 모실 돈이 충분치 않은 사람이었고, 어머니와 말 벗이 되어주지도 못했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에조차 어머니는 말없이 뫼르소를 바라보시는 일이 대부분이셨고, 함께 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시간에는 그렇게 혼자 계셨겠지요~. 뫼르소와 어머니 둘 다 양로원 생활이 현재를 이어가는 것 보다는 더 나은 생활일거라 생각한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를 양로원에 모시게 되었지만, 아마 소설에는 직접적으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의 묘사로 알게 모르게 뫼르소에게 마음의 짐이 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 됩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이상할지 모르지만.. 뫼르소에게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그 무거운(?) 짐과 부담으로 부터 '해방'이 된 것일 수 있습니다. 태양빛이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로 내리쪘다라고 묘사되는 부분은 그 마음의 해방으로 부터 얻은 '자유'인게 아닐까 생각 됩니다.
물론 어머니의 장례식 과정에서 뫼르소의 그 너무나 솔직한 그 말들에서는 조금 반감이 가는 말들도 있었고, 저 역시 어머니의 죽음을 해방과 자유로 표현하는 것이 어색하긴 합니다. 소설을 읽는 어느 순간 그 빛은 자유를 상징한 것이었다! 라고 생각이 되니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그럼 첫 번째(장례식) 태양은 어떤 면에서 자유 였을까? 를 생각하다가 떠오른 것이었는데, 읽는 누군가에게는 억지스러우실 수 있습니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독서 후기라는 점을 이해해 주셔요. ^^)
하지만 우리 주변에 착하고 멀쩡한 사람이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꼭 울지 않는 사람들도 저는 봤습니다. 후배들 중 몇 명이 몰랐는데 부모님 중 한 분께서 오랜 투병 끝에 호스피스 병동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당시만 해도 마음이 찢어질듯이 아팠는데, 의외로 장례식장에서 그 당사자들은 담담해 보였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었겠지만 오랜 시간 마음의 준비를 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가 못 볼때는 눈물을 흘렸을 수 있지만요. 말씀 드리고 싶은건 누군가의 죽음에서 우리는 초연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리의 상상속에서 대부분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일 겁니다. 아주 오랜 시간 당사자에게 그 살아있는 시간이 행복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있었던 누군가에게는 '이제 편히 쉬소서..!'와 같은 어쩌면 '안도'같은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성인이 되고 더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부모와 형제, 심지어 자식마져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증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부모와 형제간의 마음을 저의 기준으로 대입시켜서 세상을 봤습니다. 그래서 항간에 떠오는 어떤 소문, 다큐에서 나오는 가족간의 불신, 상처로 인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접하게 되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참혹한 범죄는 언제나 예외 입니다.) 어떻게 부모를.. 어떻게 형제를.. 어떻게 자식을.. 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앞,뒤와 그들만의 그 오랜 시간에 쌓인 감정들이나 세세한 사건들은 전혀 모른 채 결과만을 가지고 누군가를 비난하는 감정이 들었지요. 하지만 성인이 되고 누군가의 입장을 더 생각할 나이가 되면서 부터는 그런 감정들이 이상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가정도 있고 저런 사연도 있구나~. 하며 지금 제가 가족들을 끔찍히 사랑할 수 있는 이 상황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정말 살아갈수록 감사한 부분입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가 부모님의 죽음 앞에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그 사람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안쓰러운 마음이 들 것 같습니다. 아주 잠시지만 그 말을 들은 그 순간에는 그 상대가 애처롭고 걱정이 될 것 같아요. 어쩌면 부모의 죽음 앞에 반드시 죽을 듯이 아프고 눈물이 나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한 상황에 있기 때문에 그래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눈물이 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시간 외의 거의 모든 인생도 그렇게 울 수 있는 사람보다는 정신적으로 훨씬 덜 풍요로웠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꼭.. 제가 뫼르소를 변론하는 느낌이네요. 제가 뫼르소를 이해 하게 된 이야기는 이어서 아래에 나옵니다.)
이어서 마리와 해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장면들에서도 언제나 태양 빛이 강렬 합니다. 어머니의 죽음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데이트가 가능한 것입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죽었는데?가 아니고, 그 죽음이 힘들거나 슬프지 않았기때문에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태양 빛은 그냥 사랑을 맘껏 나누는 젊은 남녀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뜻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소설에서 이 태양 빛의 절정은 단연 사건이 발생한 그 해변가 였습니다.
레몽이 내게 권총을 건네줄 대, 태양이 그 위로 번쩍하며 미끄러졌다. 그러나 마치 모든 것이 우리 주위를 둘러막아 가두어 버렸다는 듯이, 우리는 여전히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에 이마가 팽창하는 느낌이었다. 그 모든 열기가 머리 위에서 나를 내리누르면서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뜨거운 태양의 엄청난 숨결을 얼굴에 느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바지 주머니 속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그 캄탐한 취기를 이겨 내려고 전신을 긴장 시켰다. 모래, 흰 조개껍질, 우리 조각에서 빛의 칼날이 솟아날 때마다 내 턱뼈가 움찔움찔했다.
태양과 힘겨운 노력과 여자의 울음소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며, 그늘과 휴식을 되찾고 싶었다.
불로 지지는 태양의 열기가 내 두 뺨으로 확 번졌고 땀방울들이 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고,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펄떡거렸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그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칼을 뽑더니 태양 빛 속에서 나를 향해 쳐들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되었고, 번쩍하는 긴 칼날 같은 것이 되어 내 이마를 쑤셨다.
해변가에서 넘치도록 강렬한 태양 빛에 대한 구절들을 모아봤습니다.
이 소설에서 강렬한 태양을 표현하는 마지막이자 가장 절정인 구간입니다.
통제 되지 않은, 제약 없는, 너무나 강렬하고 넘쳐서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태양(자유) 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어떤 것에 빠져 들게 되고, 너무 빠져 들면 어느 순간 그곳에서 허우적 거리게 됩니다. 미친듯이 빠져들어 에너지를 소진하는 절정에서는 그것을 빨리 종결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넘치는 그 것이 더는 소중하거나 감사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어느 순간 나를 짓누르는 무언가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단을 내리고 난 후, 시간이 지나서 그것이 한줄기 추억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의 의미,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뫼르소는 그 절정의 태양 빛 아래서에서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가 쏜 네발의 총알은 마치,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트 소리와도 같았다.'고 말합니다.
체포되고 더는 태양이 없고, 전등이 드리워진 방이 묘사 됩니다.
어느 날 철창에 달라 붙어 빛이 들어오는 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저는 비로소 뫼르소를 짓누르던 그 빛이 이제는 정말 귀해 졌다고 느꼈습니다.
나의 감방은 그보다 더 조용하고 어둑했다.
제가 태양 빛이 의미 했던 것이 자유가 아닐까! 라고 처음 생각했던 구절 입니다.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플 정도의 강렬한 태양 들이었는데, 감옥에 드러서자 마자 한줄기 빛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심문날, 밖은 태양 빛으로 화창하나 자신은 어두컴컴한 방으로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구금 생활 초기에 가장 힘들었던 점이 자신이 자유로운 사람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었고, 감옥의 간수장도 뫼르소에게 감옥 생활이 주는 가장 큰 벌은 자유를 빼앗아 간 것이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자유를 빼앗긴 만큼 뫼르소에게서 빛도 줄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의도적으로 언급 되는 듯한 태양 빛을 자유로 해석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확신은 없습니다. 뭔가 명확한 느낌도 들지 않고요,, 오래 도록 제 무의식 속에서도 이방인의 그 태양 빛에 대해 고민을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떤 순간에 유레카!를 외치는 날이 온다면 좋겠네요.
(정말이지 요즘은 많이 읽지 못해서 더 음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후기를 쓰는 지금, 이방인 소설 본문과 작가가 직접 쓴 [이방인]에 대한 편지, 그리고 역시 작가가 직접 쓴 미국판 서문까지 읽었습니다. 아직 책의 부록으로 포함된 이방인의 해설은 저의 독서 후기를 작성 후 읽으려고 남겨 뒀습니다.)
많은 독자 들이 느끼셨겠지만 작가가 썼던 '[이방인]에 대한 편지' 에서의 '소설 속에 도입될 수 있는 계산된 빛'이라는 표현으로 의도적으로 태양 빛의 양이 변화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회원님들은 이 책을 읽으시고, 빛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일부러 이 후기를 마치기 전까지 회원님들의 후기를 읽지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읽을 수 있게 되었네요. ^^
< 2. 뫼르소의 연인 마리는 어떤 사람일까? 뫼르소는 진정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
제 생각에 뫼르소는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둘이서 근무하던 사무실에서 자신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 또한 그랬던 것 같다는 것과,
사실은 나도 키스하고 싶었다.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녀를 꼭 껴안고 싶었다.
딱 한 사람 마리를 떠올렸다.
마리가 와 있을 때 그녀를 좀 더 보고 싶었다.
이런 말들은 데이트 때부터 면회 온 그녀에게 등 소설에서 여러 차례 나옵니다.
여자가 좋아할 그 표현을 항상 진심으로 느꼈지만 말하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그렇게 무심한 그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상대 연인을 사랑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사실, 뫼르소에게서 제 남편을 보았습니다. 저는 항상 남편이 정말 흔치 않은 캐릭터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건 결혼 전보다는 결혼 후에 훨씬 더 잘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고백에 흠칫 놀라실 수도 있고, 이렇게 감정이 없는 사람과 살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실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F감성 충만한 저로서는 F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람과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뫼르소에게서 남편을 느끼게 되었던 건 이러한 면 보다는 재판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언뜻 보면 풀려날 의지가 없는 것인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뫼르소는 자신의 계산을 위해서 거짓 증언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뫼르소는 있는 그대로를 말할 뿐이며, 앞뒤 없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자신을 위해서 누군가를 곤란하게 하거나 모함에 빠트리지도 않으며, 답답해도 혼자 생각하고 넘길 줄 압니다. 뫼르소는 재판 초기에 자신들을 해치려는 마음으로 칼을 준비해 왔고, 그것으로 레몽을 찔렀던 아랍인을 죽인 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초연하고 떳떳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것은 훨씬 나중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거짓 증언을 하거나 축소하거나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전달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 면이 제 남편과 가장 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 뫼르소의 많은 면이 정말 제가 느끼는 남편과 너무나 닮았지만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내가 사나이라고 대답했다. 사나이란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까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누구나 다 안다고 말했다. 내가 내성적인 성격인 것을 알고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다만,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내가 식비는 어김없이 치렀느냐고 차장 검사가 묻자 셀레스트는 웃고 나서, "그건 우리끼리의 사사로운 일입니다." 라고 말했다.
배심원으로 나와 증인석에 섰던 뫼르소의 이웃 셀레스트가 한 말이 뫼르소에 대한 아주 명확할 정도로 잘 표현한 말 같습니다. 이 말은 결정적으로 제가 남편을 바라봤을 때 드는 생각과도 같은데요~. 남편도 굳이 쓸데 없는 말을 하지 않고, 또 남편에게 식비를 누가 치르냐 하는 것들은 지극히 사사로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본인이 치르는 것을 더 좋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의 부탁에는 흔쾌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들어주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부탁 하는 일은 잘 만들지 않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크게 이렇게 저렇다 말이 없고 거의 행동으로 취합니다. 저는 이런 남편 덕분에 뫼르소가 어떤 사람인지, 심지어 세상이 주목하는 그 장례식의 상황을 읽고서도 나쁘게 보지 않는 이유 같습니다. (물론 남편은 장례식을 그렇게 보낼 정도의 정서는 아닙니다.)
때문에 저는 사건 이후 마리의 그런 노력들이 더욱 애처롭게 느껴지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리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고, 나오게 될거고, 그럼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감옥에서 면회장 저편에 있는 뫼르소에게 다시 한번 힘주어 진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증인으로 참석한 마리는 끝까지 진심으로 뫼르소를 변론했고 애써 항상 뫼르소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마리의 말대로 직장에서 서로 오래도록 봐 왔던 사이라는 점이 그럴 수 있게 만든 것 같습니다.
진정 뫼르소를 알기 때문에 그런 행동들을 자발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득 살인자임에도 불구 하고 누군가가 그(그녀)를 여전히 사랑하고, 몇 년이라고 지나서 나온다면 함께 결혼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살인자를 다시 눈여겨 볼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모친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할 지라도요. 오히려 그가 가진 사연과 그의 삶을 더 궁금해 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어떠한 상황이 와도 세상에서 남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고 남편의 됨됨이를 신뢰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 것 같습니다. 굳이 불필요한 말, 감정이나 공감조차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는 남편이지만, 어떠한 상황이 와도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리고 말보다는 그저 행동으로 먼저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 입니다. 또한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왜곡된 사실을 전하거나 꾀를 내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꼭 제가 마리가 되는 것 같았어요. 감정 이입이 되어서 뫼르소를 위해서 계속 억지 웃음을 지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가 그렇게 짠했네요.
뫼르소가 쓸데 없는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엄마의 죽음에서도 동일 합니다. 뫼르소는 구구 절절히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엄마가 죽었고, 도착하자 마자 보고 싶었지만 바로는 못 봤고, 이후에 관을 열어 준다고 했을 때는 순간 그렇게 대답한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고 후회 했지만 더 말하지 않았습니다. 엄마와의 관계나 기억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살라마노 영감이 자신의 개를 잃고 혼자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체포 후 변호사가 엄마의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는 엄마가 죽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게도 가슴 한켠에는 여느 사람과 같은 감정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마리에게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처럼, 관계나 사랑과 관심에서 너무 오래도록 멀리 있었던 사람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과 감정은 뫼르소가 굳이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마리는 소설속에서 등장하는 뫼르소의 주변 인 중 유일하게 이방인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그녀가 뫼르소를 그 무관심과 무감각에서 서서히 깨어날 수 있게 해주고 행복하게 살길 바랬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너무나 달랐지요.
그녀는 우리 두 사람의 수영복과 수건 한 장을 넣어 가지고 온 방수포 가방을 내게 열어 보였다.
살인이 일어나는 해변으로 놀러가는 날 아침의 이 문장이 왜인지 제게는 특별하게 다가 왔는데요, 슬프게도.. 이 가방이 후에 아랍인들이 뫼르소와 마리, 레몽의 도착지를 가늠하고 뒤따라와 살인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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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송은 그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우리를 따라 올 수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나는, 우리가 해수욕 가방을 들고 버스에 타는 것을 그들이 본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참 인생은 뜻하지 않게 많은 일이 일어나고 찰나가 시발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직감적으로 어떤 복선을 의미하는 듯한 문장이 있습니다. 왜 인지 더 부곽 되고 특별하게 다가오는 일상에 숨은 듯한 문장들입니다. 이 책에서는 저는 딱 이 문장이 그랬고, 얼마 전 읽었던 소설 [모순]에서는 안진진이 김장우의 형네 인사를 드리러 가던 날, '그 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하물며 조그만 강아지까지도 내가 머지않은 미래에 한집안 식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이 문장이었습니다. 둘의 사랑을 응원하던 저로서는 무서워 지는 말이었습니다. (함께 하시는 회원님들 중 많이 읽으셨어서 말해 봅니다.)
어느날 뫼르소의 사장은 파리 지사에 대한 계획을 뫼르소에게 말했고, 그에게 파리 생활을 제안했습니다. 문맥상 적어도 그 사장은 뫼르소에게 좋은 기회이며, 뫼르소 역시 설레거나 좋아할 것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장: "자넨 젊으니까, 그런 생활이 마음에 들 것 같은데.")
나는,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장은 내게 삶의 변화에 흥미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며, 어쨋건 모든 삶이 다 그게 그거고, 또 나로서는 이곳에서의 삶에 전혀 불만이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사장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의 삶을 바꿔야 할 이유는 없었다.
소설 도입부에서 처음으로 이 구절에서 뫼르소에게서 남편을 연상했습니다. 제 남편과 똑같다고 생각했지요.
이렇게 오랫동안(?) 함께 했는데도 불구하고 대화 중에 전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한 대답이 나올 때 마다 저도 조금 당황합니다. 이제는 저도 거의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갖게 됩니다.~ <1차 독서 중간 후기>에서 썼던 마리에게 한 말은 제가 과거의 제게 하고 싶은 말일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저는 마리와 같은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저희의 관계나 결혼에 대해 꽤 열심히 노력했고 잘 표현 했습니다.(오랫동안 살고 돌이켜 보니, 그 당시 남편은 자신이 가진 최대치를 썼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쨋든 저는 이런 무미 건조함에서 남편을 느꼈고 이후 재판 과정에서 확신을 느꼈던 것입니다.
< 3. 재판 과정이 왜 이렇게 충격적인 것일까? >
재판 과정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자신들의 일행을 먼저 공격한 상대를 우발적으로 죽였다 하지만, 우러나오지 않은 감정, 느껴지지 않은 감정을 말했다는 이유로, 그것도 사건과 관계가 없는 어머니 장례식이 대한 사실을 그대로 말했다는 이유로 그는 사형수가 됩니다. (당시의 프랑스 형량을 알 순 없어도, 변호사나 마리 조차도 금방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러한 우발적인 살인 사건으로 사형까지 받는 제도는 아니었을거라 추론 됩니다.)
제게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 그냥 현실 세상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우'를 너무나 잘 표현했다고 느껴집니다.
판사는 뫼르소에게 자신의 신념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모두 신을 믿는다고 자신이 믿는 대로 강요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그의 신념이었고, 만약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었다.
"당신은 내 삶이 무의미해지기를 바라는 겁니까?" 그가 외쳤다. 내 생각에, 그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요즘 말로는 '답정너' 라고 표현 하면 맞을까요. 하지만, 뫼르소 말대로 상대에게는 아무 상관 없는 일입니다.
아마 제가,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겁니다. 저 역시 누군가 제게 강요하는 것이 싫어서, 반대로 저도 인지하는 한 다른 사람에게 그러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역기서 판사나 신부(사제)는 그냥 반감이 생길 정도일 뿐입니다.
저는 증인들에게서 가장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뫼르소는 자신과 대면할때는 전혀 티내지 않았던 사람들이 알고 보니 그토록 자신을 미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몇년 만에 처음으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감정을 느꼈습니다.
관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담배를 피웠고, 또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울 당시 함께 졸았으며, 또 밀크 커피를 마셨습니다. 심지어 뫼르소에게 식사를 권했고, 입맛이 없다는 뫼르소에게 밀크 커피를 타다 줬습니다. 하지만 증인으로 출석한 관리인은 그(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임에도 담배를 피웠고, 잠을 잤으며, 밀크 커피를 마셨다고 말했고 사람들은 그 말에 격앙 되었습니다. 한순간 뫼르소는 구제 받기 힘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뫼르소의 변호사가 관리인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냐는 물음에는,
"제가 잘못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저분이 권하신 담배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끝으로 할말이 있냐는 판사의 질문에 뫼르소는.
"없습니다. 다만 증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증인에게 담배를 권한 건 사실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관리인은 약간의 놀라움과 일종의 감사의 뜻이 담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더니 그는, 밀크 커피를 권한 것은 자기였다고 말했다.
저는 이부분에서 뫼르소에게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하지 못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마치 아이를 낳고 부터는 더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많았던 남편이지만,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그의 큰 그릇을 느끼며 숙연해 질때가 있는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때 '누가 자폐인가?' 라고 물었던 것처럼, 우리 중 '누가 이방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에 이어, 검사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배심원들께서는, 아무 관계도 없는 남이야 커피를 권할 수도 있지만 아들이라면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 모름지기 그것을 거절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실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는 반감이 생겼습니다.
세상에 '마땅히' 란 있을까요~? 저는 가볍게 썼던 중간 독서후기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먼 훗날 저의 죽음 앞에 제 자식이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고 일상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제 죽음을 그렇게까지 슬퍼하고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어떤 이유라로라도 제 자식이 가슴아픈게 너무 싫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 제가 듣고 생각했던 이야기에 대해 말씀 드려 봅니다. 어떤 이가 자신의 부모님의 산소 벌초에 항상 참석을 하지만, 그 분은 종교상의 이유로 부모님의 산소에 오셔도 절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세가 드신 어른들께서는 그것이 안좋게 보이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다음에 저의 산소에 제 아들이 저를 보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들이 저를 보기 위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쁘고 너무 반가울 것 같습니다. 진심으로 제 아들이 거기까지 왔는데, 종교나 어떤 이유로 절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노엽고 잘 못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를 보러 거기 까지 온 것이 아들의 진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이라 그런건지, 아직도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부모의 상에서 자식은 마시거나 먹으면 안되는 건지요? 저는 그걸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이토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드는데, 제가 잘 못된 것일지 그것도 궁금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재판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다 사실이고 어느 것 하나 사실인 게 없습니다."
뫼르소의 변호사의 말이지만,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마리가 흐느껴 울기 시작하면서, 그게 아니다, 다른 것도 있었다, 사람들이 억지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게 만든 것이다, 자기는 나를 잘 알고 있고, 나는 그 어떤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검사는 마리를 '그의 정부'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 그녀는 그저 마리일 뿐이었다.
(검사는 어휘 선택으로 교묘히 현실을 왜곡 합니다.)
나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내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그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갖춘 장점이 어떻게 그를 죄인으로 모는 병백한 기소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검사는, 사실상 나에게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앗고, 인간다운 점도,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 주는 그 어떤 도덕적 원리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반응도 보일 줄 모르므로 인정에 호소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합니다.
너무 슬픈 일이지만, 이런걸 느낄때 마다 덜 그런 사람이 되려고 다시 마음을 정비하는 것이 전부 인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의 마지막에서 자유를 가졌을 당시에는 그렇게 세상과 분리되어 있던 뫼르소도 자유를 잃고 나서는 세상을 갈구하고 간절히 원합니다. 인생이 너무 애석하네요. 이제 다시는 그에게 그 세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들은 모두다 독자가 원하는 것을 끝까지 주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메세지를 강렬히 각인시키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탈출의 가능성, 무자비한 의식 밖으로의 도약, 희망의 모든 기회를 제공하는 광란의 질주였다. 물론 희망이란, 힘껏 달리던 도중 길모퉁이에서,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이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형수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는 것임을 나는 알아차렸다. 천 번에 단 한 번, 그것이면 수많은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저녁이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토록 오래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그 소리가 멎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면받는다는 가정 말이다. 난처한 것은, 엄청난 기쁨으로 내 눈을 찌르며 튀어 오르는 그 피와 육신의 격정을 진정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죄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이었다.
나에게 다른 삶이란, "지금의 이 삶을 회상 할 수 있는 그런 삶이죠." 라고 소리 쳤다.
이토록 현실에 무반응이었던 그도 죽음 앞에 새 삶을 격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뫼르소는 왜 자신의 엄마가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죽금에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 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맞는 말일 수 있고, 또 제가 맨 처음 태양 빛 = 자유라는 짜맞춤을 가지고 거슬러 올라가 엄마의 장례식에서 그 강렬한 태양빛은 뫼르소에게는 정신적 해방이었을것이라고 해석 했는데, 어쩌면 그것은 엄마의 해방과 자유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뫼르소가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처럼 깊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나는 소홀히 했던 것, 잊어버렸던 것들을 더 많이 기억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우리는 평소 소중한걸 잊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저의 삶은 너무나 풍요롭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100%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의지가 있어도 그런 시간을 인생에서 다시 갖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취학 아동일때가 꼭 발달 관점이 아니어도 부모와 아이에게 모든 것이 기회인 시기 입니다. 이 시기를 더 늦기 전에 인지한것이 제게는 행운이 아닌가 싶습니다. 항상 책을 읽다가, '죽음' 이라는 가정을 하면 당장 제 앞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가장 후회가 없는지 명확해 졌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아무리 답을 알고 있어도 그렇게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당장 죽음을 가정 한다면 그런 답이 나오겠지만 우리 모두는 그렇게 이상적으로 살 수만은 없고, 결국 최 우선이 아닌, 서열 2,3,4 번째의 일에 몰입하다가 간다고 해도 그건 우발적인 사건(사고)가 끼어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라고 스스로 합리화 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명백히 제 마음속 Priority No.1에 몰입 할 수 있는 삶이라서 더 의미 있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 4. 왜 뫼르소는 이렇게 세상에 무심하게 되었던 것일까? >
지금까지 글에서 처럼 개인적으로 뫼르소의 어떤 면은 상당히 고귀하게 느껴지면서도, 저 역시 소설을 읽으면서 뫼르소는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왜 이렇게 감정이나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가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환경의 이유 중 우선으로 꼽게 되는 그 '사랑과 관심, 공감.'에 대한 상상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책의 104페이지를 읽을 때 까지도 은근 뫼르소의 삶에서 그가 '무관심'을 너무 오래도록 받아온 사람은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소설에서 그 이유를 말해줄거라 기대하진 못했는데, 점점 그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에 대한 문장들이 보였습니다.
'평소에 사람들은 나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책의 104페이지(민음사 기준) 에서 이에 관한 이 문장이 제게 들어왔습니다.
'나의 의견을 묻는 일 없이 나의 운명이 결정되고 있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로막고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대체 누가 피고인가요? 피고인이 된다는 건 중요한 일이에요.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내겐 할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서 얻는 재미는 오래 계속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주 마지막에서야.. 그는 처음으로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왜이렇게 안타까울 까요..!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ㅠ)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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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뫼르소는 평생 세상과 자신이 서로 무관심한채로 살았던 것을 알게 되자 오히려 형제 같았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에 자신이 세상에 눈을 떴듯이, 비록 증오일 지언정 마지막은 세상도 자신에게 귀 기울이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뭉클하고 슬픈 결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된 호소력이 작품에 너무 잘 전달되어, 읽는 저로 하여금 삶을 반성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짧은 소설이지만, 완독 후 몇번은 밑줄 치고 메모한 내용들을 보았습니다.
제게는 저를 포함한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우매한 현실을 볼 수 있었던 재판 과정이 충격적인 소설이었고, 너무나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정직과 무거움에 감동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세상에 짖밟히고 회손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줄기 빛으로 묘사된 그 바깥 세상의 자유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현재 제가 누리고 있는, 제가 원하는 대로 계획하고 살 수 있고 수정하고 바꿀 수 있는 이 삶. 저의 부엌에서 설거지 하며 내다 보이는 그 푸른 나무의 햇살 정경이 자꾸 뫼르소가 말하는 감옥 바깥의 햇살을 담은 정경으로 떠오르는 소설이었습니다.
회원님들~ 어떻게 지내시나요?
(이 긴 글을 끝까지 읽을 누군가가 있으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안부를 묻고 안부를 전하네요~.)
저는 완전히 아이를 가정 보육으로 전향한지 한달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기가 더 없이 행복하고 감사하지만, 힘든 때가 있다면 그것은 아주 가끔 뭔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 될 것 같은 기미가 보이지 않거나, 끝이 보이지 않는 다고 느껴질 때, 그리고 아이가 여러 과 진료를 동시에 받고 있어서 거의 주 3~4회 병원 투어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에게 제가 항상 불안해 했던 그것이 영향을 미쳐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생길 때 입니다. (아직 증상만 있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열'에 관한 것도요)
하지만 또 한편으로 너무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그냥 아이와 웃고 떠들고, 손잡고 이동하는 거의 모든 시간과 아주 조금씩 또 좋은 방향으로 변화 하고 있다고 느낄 때 입니다.
무엇보다 지금의 이 시간이 소중하고 의미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앞으로 이 시간이 어떤 방향으로든 진정 저와 아이의 삶에 좋은 밑거름이 될 거란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저 뿐만 아니라 아이를 키우시는 모든 회원님들께서 이런 감정의 기복들을 겪고 계실 것 같아요~.
각자의 삶에 충실하며, 가끔씩 꾸준히 만나면 좋겠습니다.~
함께 해주시는 회원님들 감사합니다.!
노트북 드림.
항상 노트북님의 후기를 읽을때는 경건해지는 마음이 됩니다. 일단 엄청난 길이의 글을 보고 그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쓰신 노력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경의로워지거든요. 내용으로 들어가면 책에 대한 애정이 진심임이 보여서 어느하나 허투루 읽기가 미안해질 지경입니다. 이렇게 할말이 많고 생각도 많은 노트북님에게 이 공간은 좁아보이기까지 합니다. 오늘도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노트북님의 글을 읽으면서 제가 그냥 넘겼던 부분을 짚어주셔서 다시 볼수 있어 좋습니다. 세상과 형제였다는 뫼르소의 말과 다정한 죽음. 내가 죽을때 세상 사람들이 많이 봐주길 바라는 마음. 이 일련의 말들의 연관성을 되짚어보는 시간이 되었어요. 전 아직도 그 의미가 확연히 와닿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먼 훗날 재독을 하게된다면 그때는 뭔가가 짚힐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흐릿한 느낌만 가지게 됩니다.
노트북님의 이런 글을 보고 싶어서 뇌과학 책도 함께 읽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정성스런 글 잘 읽었습니다.
아이와의 시간도 씩씩하게 잘 해나가실거라 믿습니다. 언제나 응원합니다. ㅎ
애기 삼시세끼 차려 먹이고 온종일 케어하시면서 짬짬이 책도 읽고 글도 쓰시는 모습이 너무 멋지고 존경스럽습니다!! 응원감사합니다 노트북님 저도 힘내겠습니다~~💕
노트북님~오랜만에 들어와 후기를 읽었는데, 잠시 혼자 앉아 노트북님 글을 읽는 이 짧은 시간이 참 편안하고 행복하네요. 이방인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뫼르소가 느꼈다던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문구가 저에게 헤르멘헤세의 <페터 카멘친트> 라는 소설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다정한 죽음’에 대해 깨닫게 되었거든요. 저의 개인적인 경험과 맞닿아서 더 그랬을지 모르겠지만, 대가들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참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노트북님도 잘 지내시지요? 저는 잠시 일상과 제 마음의 파도에 휘몰아쳐 지내고 있어요. 책을 읽고 후기를 쓸 여유는 안 생기지만, 차곡차곡 마일리지 쌓듯 일상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보려구요. 그렇게 쌓아서 힘이 나면 또 찾아와 후기도 읽고 안부도 여쭙겠습니다^^ 건강 잘 챙기셔요~~